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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학의 진화와 현대적 의미

1. 신학이란 무엇인가? (신을 모르는 인간의 몸부림)

신학은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거대한 사상적 전통 위에 서 있습니다. 흔히들 신학을 단순히 ‘신을 아는 학문’이라고 오해하곤 합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신학은 “우리는 신을 온전히 알 수 없다“는 겸손한 고백에서 출발합니다. 만약 인간이 신을 완벽히 분석하고 알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신학이 아니라 인문학이나 철학, 혹은 그보다 낮은 차원의 지식에 불과할 것입니다.

신은 인간의 지성을 초월해 있기에 우리는 신학을 추구하고, 신학은 신을 모르기에 역설적으로 그 신을 바라보는 ‘인간‘에게 집중합니다. 모든 신앙 고백은 결국 인간의 언어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신학은 인간의 언어라는 한계 속에서, 언어 너머에 계신 신의 존재와 우리 삶의 관계를 파악하려는 치열한 시도입니다. 철학이 보편과 조화에 머문다면, 신학은 그 한계를 인정하고 그 위에서 인문학, 과학, 심리학의 언어로 어떻게 신비를 그려낼지 고민하는 학문입니다.

 

2. 신학의 뿌리, 고대 철학과의 만남

신학이 학문적인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중세 무렵입니다. 안셀무스의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라는 기조 아래 본격적인 신학적 사고가 시작되었죠. 하지만 그 뿌리는 초기 교부들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그들은 당대 최고의 지성인 플라톤과 플로티누스의 철학을 빌려 기독교를 설명하려 했습니다.

특히 플로티누스의 ‘유출설‘은 초기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는 마치 태양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듯, 절대적인 존재(일자)로부터 세상 만물이 흘러나왔다는 사상입니다. 그들은 존재의 등급을 다음과 같이 나누었습니다.

  • 헨(The One): 일자, 즉 모든 것의 근원인 절대자
  • 누스(Nous): 세계를 주관하는 정신
  • 프시케(Psyche): 영혼
  • 훌레(Hyle): 가장 낮은 단계인 물질

이러한 단계적 세계관은 우리가 흔히 아는 천국(빛, 이데아)과 지옥(어둠, 물질)이라는 이원론적 세계관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3. 기독교의 고유한 답변: 삼위일체

초기 신학은 이 플라톤주의의 그릇에 기독교를 담으려 했지만, 곧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철학에서 말하는 ‘일자’는 태양처럼 의지 없이 빛을 비추는 무생물적인 존재에 가까웠고, 조물주가 따로 있다는 설정은 자칫 신이 여러 명이라는 오해를 낳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학은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철학적 등급론을 거부하고, 하나님은 위계가 없는 동등한 분이시라는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한 것입니다.

이 과정은 치열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사이에 등급이 있다는 ‘종속설‘이나, 한 분 하나님이 가면만 바꿔 쓰고 나타난다는 ‘양태론’ 같은 주장들이 등장했지만, 교회는 이를 모두 이단으로 규정했습니다. 대신 세 분 하나님이 서로 구별되면서도, 본질적으로는 완전히 평등하고 하나이시라는 신비를 확정하며 플라톤 철학의 한계를 넘어섰습니다.

 

4. 중세의 빛과 그림자: 이성과 원죄

이후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를 거치며 신학은 ‘진리를 탐구하는 이성적 학문’으로 자리 잡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숙제가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나왔다면, 인간의 죄도 하나님 탓인가?”라는 질문이었죠.

이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으나(유출), 스스로의 죄로 인해 오염되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원죄’입니다. 문제는 이 교리가 지나치게 강조되면서, 인간을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으로만 몰아갔다는 점입니다. “나는 죄인이니 벌을 받지 않으려면 무언가 바쳐야 한다”는 공포심은 과도한 고행과 면죄부 판매라는 비극을 낳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의 대상이 아닌, 두려운 심판자로만 인식하게 만든 것입니다.

 

5. 종교개혁, 이성을 통한 신앙의 회복

이러한 공포 신앙을 타파한 것이 종교개혁자 칼뱅입니다. 그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이 주신 ‘이성’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신앙을 정립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종교개혁의 핵심은 맹목적인 신비주의나 면죄부 같은 미신적 행위를 걷어내고,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상식과 이성 안에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인간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명확하게 신앙하되, 모르는 신비의 영역은 겸손하게 남겨두자는 지혜였습니다. 오늘날 장로교가 예배 형식을 단정하게 하고 교육을 중시하는 전통도 여기서 비롯되었습니다.

 

6. 근대 신학의 거장들: 감정과 말씀의 변증법

현대에 이르러 신학은 더욱 풍성해집니다. 슐라이어마허는 교리에 갇힌 신앙을 거부하고, 인간 내면의 ‘절대의존감정’—곧 절대자를 향한 직관적인 마음—이 신앙의 본질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각자가 경험한 하나님을 존중하며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교회라고 여겼습니다.

반면, 칼 바르트는 인간의 감정만 의존하다 보면 결국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사라진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말씀(Logos)’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그는 인간의 종교적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주시는 계시,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이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7. 삶의 자리로 내려온 신학: 실존, 희망, 해방

현대 신학자들은 이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자리로 모셔옵니다.

  • 폴 틸리히: 하이데거 철학을 수용하여, 신앙은 죽어서 천국 가는 티켓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물음에 답하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 위르겐 몰트만: ‘희망의 신학’을 통해, 미래의 하나님 나라가 현재로 다가오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종말론적 희망이 있기에 우리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변화시킬 힘을 얻습니다.
  • 해방신학(구티에레스): 하나님은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의 삶 속에 계신다는 것을 역설하며,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신앙을 강조했습니다.

이들은 신앙을 “죽은 뒤의 보험”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재해석했습니다.

 

8.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

판넨베르그와 같은 현대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교회의 담장 안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 전체를 통해 활동하신다고 봅니다. 이는 역사가 흘러가는 과정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마치 삼위일체 하나님이 서로 조화를 이루시듯, 하나님과 역사, 그리고 개인은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작동하며 구원을 향해 나아갑니다.

 

9. 우리의 얼로 신학하기

서구의 신학이 천 년 넘게 그들의 언어와 철학으로 하나님을 설명해 왔다면, 이제 우리에게는 ‘우리의 신학’이 필요합니다. 한국인의 정서, 역사, 그리고 ‘얼’이 담긴 언어로 하나님을 고백할 때 신앙은 비로소 우리 피부에 와닿는 실재가 됩니다.

감리교신학대학교의 선배이신 故 변선환 학장님, 이정배 교수님, 그리고 제 스승이신 최태관 교수님 같은 분들이 끊임없이 한국적 신학의 길을 닦아오셨습니다. 저 또한 조직신학 박사과정생으로서, 하이데거의 실존적 사유를 통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우리말로 규명하기 위해 수학 중입니다.

아직은 부족하지만, 거창한 서구 이론을 답습하는 것을 넘어 우리의 고민과 아픔을 담아내는 신학을 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얼로써 함께 어우러지는 참된 신학의 길이 열리길 꿈꾸며, 이 길을 함께 걷고 고민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평화.

 

강리바이블러의 아바타

글쓴이 강리바이블러

강경석 목사 | 예당교회 담임, Re:Bible 총괄 디렉터 감리교신학대학교 Ph.D 수료. 딱딱한 신학을 일상의 언어로 번역하며, 성서를 입체적으로 읽고 삶으로 살아내는 여정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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