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을 알 수 없는 인간, 그래서 ‘틀’을 만들다
칸트는 우리가 신을 직접 알 도리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류(분류)와 관념(생각)을 통해 신의 흔적을 쫓아야 한다고 말했죠. 우리 안에 신의 흔적이 있고, 그것이 우리 사고의 뿌리가 되기 때문에 그 흔적을 깊이 파고드는 것이 신을 찾는 길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이 작업은 인간이 하는 일입니다. 인간은 신의 영역인 절정과 초월의 경지를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 이해할 수 있도록 단계를 정하고 분류를 해서, 그에 맞는 ‘범주(틀)’를 설정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틀을 정하지 않으면, 우리 머릿속은 수만 가지 파편적인 생각들이 난립해 도무지 진리를 알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즉, 흩어진 파편들을 모아 정리하는 것이 바로 ‘범주’인 셈입니다. (칸트는 이를 오성이라고 불렀지만, 그냥 ‘틀’이라고 이해해도 충분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사용하던 이 ‘틀(범주)’ 만드는 습성을 하나님을 대할 때도 똑같이 써먹는다는 것입니다.
신의 뜻을 다 알 수 없는 인간은 그 불안함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도덕’과 ‘윤리’라는 엄격한 규칙을 만들어 신의 자리를 대신 차지해버립니다. 신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며 시작했지만, 결국엔 인간이 정한 범주로 “반드시” 지켜야 할 선을 긋고 법적 강제성을 부여하는 것이죠.
결국 칸트는 신을 인정하되 알 수는 없다고 말하는 ‘불가지론’의 태도를 취합니다. 이는, 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인간은 결국 법적인 강제성에 기대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2. 율법의 감옥에 갇힌 교회, 다시 성서를 읽다
기독교, 아니 야웨를 믿는 종교들의 ‘율법주의’가 바로 이 지점과 똑같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알 수 없으니, 사람들은 불안해하며 끊임없이 “거룩”의 가치를 만들고 “성결”의 범주를 정해 등급을 매깁니다. 문제는 율법주의에 갇힌 사람들이 인간이 만든(혹은 인간이 기록한) 율법적 가치에 나중에야 슬쩍 ‘하나님의 이름’을 갖다 붙인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만든 법이 곧 하나님의 음성이 되고 말씀이 되어버립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보다 자신들이 만든 율법에 더 매몰됩니다. 그 법을 지켜야만 거룩하다고 믿으니까요.
그러므로 도덕과 윤리를 칼같이 들이대며 교리적으로 난리를 치는 사람일수록, 사실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모른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자신을 하나님의 대리인이라 믿게 됩니다. 니체는 이런 상태를 두고 “가짜 행복”이라며 조롱에 가까운 맹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자신이 믿는 가치로 신을 증명하려 하는데, 그것이 다른 사람을 배제하고 비난하며 비참하게 만든다면, 그런 신은 믿을 가치가 없습니다. 고작 인간을 차별하고 편 가르기 위해 존재하는 신이라면, 그건 신이 아니라 ‘차별주의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도덕과 교리로 무장해서 자신들의 윤리와 신을 강요하는 모습, 이것이 지금 한국 교회의 아픈 현실입니다. 자신들이 상정한 신이 차별적인 존재이니, 정치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갈라치기가 가능한 것입니다.
3. 해법: 성경으로!
이런 한국 교회의 현실을 푸는 해법은 결국 성경을 “제대로” 읽는 것에 있습니다. 그냥 글자만 주구장창 읽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율법의 틀을 넘어 하나님의 마음을 “제대로” 읽어내는 것입니다.
이 작업은 저의 소명입니다. 이 작업이 빛을 발하는 날이 오길, 그리고 제대로 성경 읽기를 꿈꾸는 모든 분들과 그날을 함께 누리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