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신학은 모든 언어의 총합이고
2. 설교는 모든 말의 책임이 되어야 한다.
신학이 언어를 지배한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언어적 이해를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표현불가의 하나님을 고백하고. 로고스의 말씀사건(에벨링)으로 드러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 삼고. 오순절 말 사건으로 흩어진 인류가 조화를 이루게 되는 것. 이것이 성서-신학에서의 역사성입니다.
이 흐름을 보면 개별적 존재인 인간이 인식하는 하나님-세계-현실을 투영하고 있음을 알게됩니다. 곧 개인이 신앙으로 살아가는 크기를 보여주죠. 이 순서를 거슬러 올라가면 개인은 세계(타인)를 통해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 다워라” 라고 고백하는 축복송은 사실 엄청난 기독교적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역할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하죠. 어둠 속에서 분간하게 해주는 빛 한 줄기. 싱거운 음식을 최고의 요리로 만들어 주는, 썩지 않게 막아주는 소금 한 줌. 그게 그리스도인 입니다. 그 역할을 감당할 때, 내가 이웃에게 광장과 같이 넓어지고 열린 사랑이 될 때(들뢰즈),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그 사랑 안에서 활동하시며 태초부터의 사랑을 드러내시고 확정하십니다.(최태관)
철학적 사유를 따라 인간의 개별성, 개인의 가치의 고결함을 따라가는 것은 철학적 사유가 있는 사람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엔 사랑이나 온정, 조화나 보편은 없이 그저 현실과 현상만 분석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건 신학이 아닌 겁니다.
신학은 다른 학문을 배워야 하는 열등한 학문도 아니고, 멍청한 인간들만 포진한 곳도 아닙니다. 오히려, 철학은 할 수 없는 초월과 절대자를 향한 언어를 소화해야 하고 이해시켜야 하기 때문에, 누구보다 더 치열하게 공부하는 학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상의 언어를 신학적으로 재해석하고, 때로는 신학적 세례를 주기도 하고, 때로는 비난을 받기도 하면서도 신학은 끊임없이 모든 언어로의 책임을 지기 위해 존재합니다.(틸리히, 판넨베르크) 이 작업이 멈추면, 다른 언어로 의문을 가진 신앙에 응답하지 못하게 되겠죠.
그리고 이러한 언어(Langue)로 성도의 실재적 삶의 “말(Parole)“로 풀어내는 것, 성서의 문자를 “말씀(Logos)”으로 풀어내는 것이 설교의 역할이자 목사의 소명입니다. 이 언어-말씀-말 의 관계성을, 여기서 비롯되는 조화를, 또한 동시에 분열과 고립을 극복하지 못하면 그건 신학도 아니고 목회도 아니고 그냥 인문학이고 철학일 뿐입니다. 세상이 분열과 개별화를 말할 때 그걸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고 넘어서고 담아내어 이웃과 세계와 하나님과의 합생으로 나가는 것(존 캅; 과정신학)이 신학과 목회자가 할 책임입니다.(레비나스)
이 과정은 지난한 일이 분명합니다. 관심도 적고, 교계에서도 지적과잉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리고 저는 이 일을 해야합니다. 언제까지 칼빈과 루터의 시대에 갇혀 있어야 만족하겠습니까? 언제까지 철학자들의 언어에 굴종하고 살아야 합니까?
성경으로 돌아가기 위해, 제대로 성경을 읽기 위해 저는 공부해 왔습니다.
이제 함께 제대로 읽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