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Bible 기획 연재] 세상의 문화 앞에서 길을 잃은 한국 교회 (총 3부작)
부제: 질문을 허락하지 않는 교회는 문화를 재창조할 수 없다
1. 성도에게 짐을 지우기 전, 교회가 먼저 답해야 할 질문
우리는 2편에 걸쳐 세상을 변화시키는 진짜 힘이 ‘거대한 기독교 자본’이 아니라 ‘평신도들의 일상적 역량(리좀적 저항)’에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평신도들은 뼈아픈 역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문화적 변혁자로 살아가야 한다면, 정작 그 성도들을 파송하는 교회 내부의 문화는 과연 생명력이 넘치고 건강합니까?”
강단에서는 이원론적이고 권위적인 문화를 고수하면서 평신도에게만 “일상의 문화를 변혁하라”고 요구한다면, 이는 철저한 모순이자 무책임한 책임 전가입니다.
2. 세상의 ‘미시 권력’을 흉내 내는 낡은 수목형 교회
냉정히 현실을 돌아봅시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의 내부 구조는 세상을 변혁하기는커녕, 세상의 ‘처세형 미시 권력’과 자본주의적 생존 방식을 그대로 흉내 내고 있습니다.
들뢰즈가 비판했던 상명하복의 ‘수목형 구조’는 여전히 교회의 구조 속에 가장 견고하게 뿌리내려 있습니다. 효율성과 양적 성장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수치가 교회의 사역을 평가하는 잣대입니다. 이런 변함없는 구조 속에서 변혁을 외쳐봤자 자기 모순을 확인할 뿐입니다. 제임스 K.A. 스미스(James K.A. Smith)가 지적했듯, 우리는 세속의 문화적 예전(Liturgy;예배 의식)을 비판하면서도, 정작 교회 내부에서는 세속의 욕망을 고스란히 답습하는 ‘잘못된 예전'[5]을 반복해 왔습니다. 이런 낡고 모순된 형식 안에서는 결코 세상의 체제에 균열을 내는 역동적인 성도(리좀)가 길러질 수 없습니다.
3. ‘정답을 먹여주는 곳’에서 ‘해석적 공동체’로의 전환
평신도들이 치열한 세상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시선으로 일상을 재해석할 수 있으려면, 교회는 가장 먼저 ‘질문이 허락되는 해석적 공동체’로 체질을 개선해야 합니다.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의 통찰처럼, 교회가 세상을 섬기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교회 자체가 세상의 논리에 저항하는 ‘대조 사회(Contrast Society)'[6]가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일방적으로 정답을 하달하는 선생이나 관리자가 아니라, 성도들이 세상 문화에 던지는 치열한 질문들을 곁에서 함께 고민하고 성경적 언어로 엮어내는 ‘신학적 페이스메이커’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따라 교회는 주입식 성경공부 대신, 직장과 가정에서 겪는 도덕적·문화적 딜레마를 내어놓고 복음으로 토론할 수 있는 수평적 소통 구조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4. 결론: 문화를 외면할 것인가, 예수의 이름으로 재창조할 것인가
우리가 교회 내부의 권위주의적 문화를 깨뜨리고 성도 개개인의 문화적 역량을 키워내지 못한다면 한국 교회의 미래는 암담합니다. 나아가 머지않은 미래에 기독교의 진리와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날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이나 <메시아>가 보여주듯 그저 대중문화 속의 오락적 소비재로서 숨만 붙어 살아가거나, 아예 사람들과 사회의 관심에서 완전히 벗어나 버리고 말 것입니다.
교회는 문화를 지배하는 요새가 아닙니다. 세상의 팍팍한 문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되, 그 안에 복음의 가치를 심어 환대와 연대의 생명을 ‘재창조’해 내는 거룩한 부활의 용광로가 되어야 합니다. 강도의 손에 들린 칼은 사람을 해치지만 의사의 손에 들린 칼은 사람을 살리듯, 문화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교회의 미래는 결정될 것입니다.
거대 서사가 무너진 21세기. 낡은 교회의 거푸집을 깨고 일상의 한복판으로 흩어진 성도들이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문화를 다시 써 내려갈 때, 세상은 비로소 교회를 통해 다시 희망을 묻기 시작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