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언어의 한계가 하나님의 한계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인간의 모든 것을 규정한다고 했습니다. 그렇기에 개인의 언어의 한계는 곧 그 사람이 인식하는 세계의 한계를 의미합니다. 즉, 내가 아는 만큼만 말할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만큼만 세계를 안다는 뜻입니다. 이 말에 반박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내가 모르는 세계가 있을 수 있는 거 아니냐?”라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모르는 걸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막연히 ‘짐작’하는 것밖엔 없죠.
또 다른 철학자인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고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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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의 ‘존재’란?] |
이 말을 좀 풀어 보자면, 일차적으로 인간은 언어가 있어야지만 이처럼 모호한 것 같으면서도 전체인 것 같은 ‘존재’를 비로소 설명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과거 서구 철학은 이 세상을 명확히 설명하기 위해 크고 신비로운 ‘존재’를 쪼개어 ‘존재자, 존재성’ 등으로 바꿔 설명했습니다. “신”이나 “도덕”, “절대자”와 같이 우리가 명확하게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입니다. 하이데거는 이를 두고 서구 철학의 실패라고 규정했습니다. 애초부터 크고 무한한 것을 좁은 언어로 쪼개어 규정하려 한 접근 방식 자체가 잘못됐다는 겁니다.
교회가 만들어 낸 언어
그리고 이차적으로 살펴볼 의미로는, 언어가 존재의 집이 된다는 건 결국 ‘존재를 집 안에 가둔다’는 뜻이 됩니다. 즉, 인간이 존재에 대한 언어를 임의로 만들어 내고는 무한한 존재를 그 좁은 언어 안에 가둬 버린다는 것이죠. 이를 잘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가 바로 교회의 ‘교리’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해 수많은 언어를 만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신학이 발전했고, 교회가 부흥했으며, 교리와 신앙의 정통성을 굳건히 수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서 하이데거의 관점을 좇아가면, 교회 역시 결국 크고 무한하신 하나님을 인간의 언어(교리) 안에 가둬버렸다는 의미가 됩니다.
실제로 개신교의 경우 수많은 종파가 갈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당장 여러분이 동네 한 바퀴만 돌아도 교회가 꽤 많이 보일 텐데, 그중 완전히 같은 교파는 하나도 없거나 거의 없을 겁니다. 개신교회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야훼)을 믿는 종교 계열 전체로 보자면 유대교, 유대교 신비주의, 로마 가톨릭, 동방 정교회, 아시리아 교회, 개신교회, 독립교단, 재세례파, 퀘이커, 회중교회 등등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이들은 모두 ‘일신교’로 하나의 신만을 믿는 종교입니다만, 분리된 종파들의 모습을 보면 도저히 한 분의 신을 믿는 것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저들은 결코 하나가 되지 못하거든요. 서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나가 될 수 없는 결정적 이유는 사실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만든 “교리” 때문입니다. 분명히 같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설명하는 “언어”가 서로 다르다는 이유로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즉, 하나님보다 내 언어(교리)가 더 큰 우위를 차지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기 교리라는 집에 가둬버리고는, 각자 자기 집만이 진짜 집이라고 말하며 다투는 꼴이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죠.
이걸 극복하기 위한 움직임이 바로 “에큐메니컬(Ecumenical)”이라는 교회 일치 운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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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큐메니컬 운동이란?] |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보았을 때 에큐메니컬 운동의 근본 목적은, 하나님을 좁은 인간의 언어(교리)라는 집에서 다시 빼내는 것, 그 가당찮은 집을 무너트리는 것입니다. 인간의 언어로 함부로 해석될 수 없고 가둬질 수 없는 하나님의 무한한 존재 그 자체를 이야기하기 위함입니다. 어느 한 교파와 교리만이 무조건 옳다고 주장한다면, 그건 하나님의 크신 존재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일입니다. 만약 인간의 좁은 언어로 모든 사람의 생각과 믿음이 완벽하게 통일될 수 있다면, 그건 애초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고귀한 ‘자유’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음 글에선…
하나님은 인간을 기계로 만들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명령마저 어길 수 있는 무한한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 자유를 가지고 끝없이 하나님을 규정하고 가두려 할까요? 다음 편에서는 포이어바흐와 칼 바르트의 신학적 통찰을 통해, 우리가 믿고 있는 신이 사실은 ‘나의 욕망이 투영된 허상’은 아닌지 정직하게 대면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