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Bible 성경 다시 읽기

예정론 더 보기① “전통적 예정론: 절대 주권의 그림자와 숙명론의 감옥”

예정론은 루터와 칼뱅 이후 개신교 전통의 핵심적인 논의였으며, 지금까지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 미완의 주제입니다. 아마도 성서에 관한 결정적인 고고학적 발견이 있지 않는 한, 이 문제는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신학적 난제로 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해묵은 문제를 다시 들춰내어 애꿎은 논란과 불화를 자초하는 이유는, 예정론이야말로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 그리고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신학의 가장 기초적인 문법들을… 예정론 더 보기① “전통적 예정론: 절대 주권의 그림자와 숙명론의 감옥” 계속 읽기

예정론 ① “하나님의 계획과 나의 자리”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예정론’. 전통적인 관점과 오해를 넘어, 예정론의 진짜 의미와 가치를 총 5회에 걸쳐 찾아가 보겠습니다. 이 글은 [질문하는 신학]에도 동시 연재됩니다. 여기서는 읽기 쉬운 축약본으로, [질문하는 신학]에서는 좀 더 깊이 읽을 수 있는 글을 게재합니다. 보다 더 깊은 이해를 원하시는 분들은 [질문하는 신학]의 글들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 예정론 ① “하나님의 계획과 나의 자리” 계속 읽기

미가 1:3 “무너지는 높은 곳, 그 이면의 애통함”

“보라 여호와께서 그의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사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 (미가 1:3) 내가 견고하다고 믿었던 ‘높은 곳’들이, 실은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화려한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요새 뒤에 숨어, 자신들만의 우상을 숭배하며 그 풍요가 영원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높이며 쌓아 올린 그 ‘산당’들은 하나님의 강림 앞에 촛농처럼 녹아내리고, 골짜기로 쏟아지는… 미가 1:3 “무너지는 높은 곳, 그 이면의 애통함” 계속 읽기

교회의 언어 바꾸기 -2편

내가 믿는 것은 하나님인가, 투영된 나 자신인가 인간은 창조될 때부터 하나님께로부터 자유를 받았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흙으로 창조하시고 그의 코에 하나님의 영의 숨결을 불어 넣어주셨고, 그로 인해서 인간은 “생령(살아있는 영)”이 됩니다. 곧 살아 있는(생; 生 – 육신적 기반) 존재임과 동시에 영혼을 가진(영; 靈 – 영혼과 정신적 기반) 존재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는 인간이 온전히 하나님처럼 완벽한… 교회의 언어 바꾸기 -2편 계속 읽기

성경은 완벽하고 오류가 없다는 폭력에 관해 – 도입

기독교인의 기고만장함의 근원, 성경 일부 보수 기독교인들이 끝없이 교만한 이유를 뒤집어 보면, 성경을 코란(쿠란)처럼 대한다는 공통된 특징이 나옵니다. 성경은 낱자와 받침, 점 하나까지 일점일획 오류와 오기가 없는 완벽한 책, 하늘의 글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죠. 이걸 성경 무오설이라고도 하는데, 사실 기독교보다는 이슬람교에서 더 확고하게 받아들여지는 “설” 입니다. 코란은 대예언자 무하매드가 알라에게 받은 글이라고 해서, 그 내용은 물론,… 성경은 완벽하고 오류가 없다는 폭력에 관해 – 도입 계속 읽기

교회의 언어 바꾸기 -1편

내 언어의 한계가 하나님의 한계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인간의 모든 것을 규정한다고 했습니다. 그렇기에 개인의 언어의 한계는 곧 그 사람이 인식하는 세계의 한계를 의미합니다. 즉, 내가 아는 만큼만 말할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만큼만 세계를 안다는 뜻입니다. 이 말에 반박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내가 모르는 세계가 있을 수 있는 거 아니냐?”라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모르는… 교회의 언어 바꾸기 -1편 계속 읽기

나훔 3:1 “위선적 평화의 몰락”

“화 있을진저 피의 성이여 그 안에는 거짓이 가득하고 포악이 가득하며 탈취가 떠나지 아니하는도다” (나훔 3장 1절) 타인의 희생을 딛고 세워진 평화는, 가장 잔혹한 폭력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평온함과 성취는, 과연 무해합니까? 경쟁에서 이기고 얻어낸 견고한 내 자리. 우리는 종종 그것을 ‘합리적 경쟁’이나 ‘상생’이라는 세련된 단어로 위장하곤 합니다.   과거 ‘앗수르’라는 거대한 제국도… 나훔 3:1 “위선적 평화의 몰락” 계속 읽기

나훔 2:1 “바벨의 고립”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나니 너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수하며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지어다” (나훔 2:1) 내가 쌓아 올린 안온한 세계가, 실은 나를 가장 철저히 고립시키는 바벨탑이었습니다. 우리는 미래의 불안을 지우려 끊임없이 스펙을 쌓고, 철저히 자신을 계발하며 안정을 구축하려 애씁니다. 앗수르 역시 주변을 점령하고 강제로 종속시키며 모든 자원을 모아 거대한… 나훔 2:1 “바벨의 고립” 계속 읽기

기독교인에게 중립은 없다 2: 정답을 독점한 종교는 어떻게 폭력이 되는가

[서론] 거룩한 결핍의 시작: 사랑이 허락한 틈 전통적 기독교 세계관에서 세계는 본질적으로 결핍과 회복의 순환관계를 가집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악(결핍)을 덮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가죽 옷이란 어떤 동물을 죽여야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완벽했던 세계에 ‘죽음’이라는 치명적 결핍을 야기했고, 아담과 하와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완벽함 속에 결핍, 곧 발타자르가 말했던 사랑의… 기독교인에게 중립은 없다 2: 정답을 독점한 종교는 어떻게 폭력이 되는가 계속 읽기

기독교인에게 중립은 없다 1

화려한 언변으로 치장해 중립을 마치 기독교 정신인 양 둔갑시켜도, 그건 그저 면피용 도덕적 알리바이이자 신학의 부재가 낳은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중립은 결국 양비론입니다. 이는 불의한 권력에 면죄부를 주고, 비겁하게 침묵했던 자들에게 면류관을 씌워주는 꼴입니다. 본회퍼는 나치에 부역하고 방조하면서도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뿐”이라며 도피했던 ‘중립적’ 교회를 향해, 그것은 “싸구려 은혜”라고 일갈했습니다.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투투… 기독교인에게 중립은 없다 1 계속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