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Bible 성경 다시 읽기

달란트 유감 시리즈 ⑥ 예수님도 사실 ‘1달란트 흙수저’였다?! 그분이 남긴 진짜 이윤

달란트 비유 6부작의 대단원! 세상의 기준으로는 철저한 1달란트 흙수저였던 예수님이 어떻게 세상을 구원하셨을까요? 능력주의를 박살 내는 십자가의 은혜와 달란트 비유의 진짜 결론을 맺습니다. 어느덧 ‘달란트 비유 팩트 체크’의 마지막 시간입니다! 우리는 지난 5편의 여정을 통해 달란트가 타고난 재능도, 직업도, 영적 스펙도 아님을 확인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이 모든 오역의 사슬을 끊어낼 마지막이자 가장 치명적인 질문을… 달란트 유감 시리즈 ⑥ 예수님도 사실 ‘1달란트 흙수저’였다?! 그분이 남긴 진짜 이윤 계속 읽기

나훔 3:11 “욕망과 권력의 허무함”

“너도 취하여 숨으리라 너도 원수들 때문에 피난처를 구하리라” (나훔 3:11) 스스로 영원할 것이라 믿고 취해있던 영광은, 삶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를 속수무책으로 무너뜨립니다.   영원할 줄 알았습니다. 내가 쥐고 있는 이 알량한 성공과 안정감이. 통장 잔고, 직장의 타이틀, 사람들의 인정. 우리는 종종 나의 스펙과 능력, 재력이라는 달콤한 취기에 깊이 빠져 살아갑니다. 그것이 내 삶을 영원히… 나훔 3:11 “욕망과 권력의 허무함” 계속 읽기

달란트 유감 시리즈 ④ 교회를 삼킨 자본주의 괴물 – 교회에 차별이 발생하는 이유

교회가 언제부터 실적과 스펙으로 성도를 평가하는 주식회사가 되었을까요? 달란트와 은사의 오역이 한국 교회에 불러온 뼈아픈 자본주의적 계급 사회의 민낯을 고발합니다. 지난 3편에서 우리는 ‘은사’라는 단어가 개인의 영적 능력을 증명하는 스펙이 아니라, 공동체의 화평을 위한 도구이자 실존적인 고백(믿음) 그 자체임을 확인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아주 뼈아픈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의 본래 의도가 이토록 명확한데, 대체… 달란트 유감 시리즈 ④ 교회를 삼킨 자본주의 괴물 – 교회에 차별이 발생하는 이유 계속 읽기

나훔 3:1 “위선적 평화의 몰락”

“화 있을진저 피의 성이여 그 안에는 거짓이 가득하고 포악이 가득하며 탈취가 떠나지 아니하는도다” (나훔 3장 1절) 타인의 희생을 딛고 세워진 평화는, 가장 잔혹한 폭력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평온함과 성취는, 과연 무해합니까? 경쟁에서 이기고 얻어낸 견고한 내 자리. 우리는 종종 그것을 ‘합리적 경쟁’이나 ‘상생’이라는 세련된 단어로 위장하곤 합니다.   과거 ‘앗수르’라는 거대한 제국도… 나훔 3:1 “위선적 평화의 몰락” 계속 읽기

달란트 유감 시리즈 ③ 방언 못 하면 1달란트인가요? 가장 폭력적인 단어가 되어버린 ‘은사’

달란트의 사촌 격인 ‘은사’를 개인의 영적 스펙으로 오해하고 계시진 않나요? 방언을 비롯한 은사의 진짜 목적과 눈에 보이지 않는 가장 위대한 ‘믿음의 은사’를 실존적 신학으로 팩트 체크합니다. 지난 2편에서 우리는 달란트를 타고난 재능으로 해석하는 순간, 기독교가 사주팔자 같은 운명론으로 전락한다는 사실을 짚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달란트의 사촌 격인 은사(Gift)입니다. 교회에서 흔히… 달란트 유감 시리즈 ③ 방언 못 하면 1달란트인가요? 가장 폭력적인 단어가 되어버린 ‘은사’ 계속 읽기

참혹한 역사 앞에서 하나님은 침묵하시는가? (하)

십자가, 철학의 우상을 깨고 역사에 뛰어든 하나님. 하나님은 ‘보험’도, ‘부동의 동자’도 아니다. [지난 상편 요약] – 하나님의 침묵: 참혹한 역사 속 하나님의 침묵은 방관이 아니라, 인간에게 강제적 조종이 아닌 ‘완전한 자유’를 허락하신 필연적 결과. – 규모의 오류: 거대한 악(대형 참사)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억지로 개입하셔야 한다는 것은 순환논리이며, 고통은 규모가 아닌 실존의 문제. – 훼손된 자유:… 참혹한 역사 앞에서 하나님은 침묵하시는가? (하) 계속 읽기

달란트 유감 시리즈 ② 하나님이 ‘사주팔자’를 극혐하시는 이유 – 내 달란트는 이미 정해졌다?!

달란트를 타고난 재능이나 운명으로 해석하면 벌어지는 끔찍한 신학적 오류. 기독교를 사주팔자와 다를 바 없는 운명론으로 전락시키는 달란트 오역의 팩트를 체크합니다. 지난 1편에서 우리는 달란트를 스펙이나 능력치로 해석할 때 벌어지는 끔찍한 능력주의의 민낯을 확인했습니다. 자, 오늘은 그 논리를 한 걸음 더 삐딱하게 밀고 나가보겠습니다. 만약 내 달란트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다면, 우리의 신앙은 세상의 사주팔자나 운명론과… 달란트 유감 시리즈 ② 하나님이 ‘사주팔자’를 극혐하시는 이유 – 내 달란트는 이미 정해졌다?! 계속 읽기

참혹한 역사 앞에서 하나님은 침묵하시는가? (상)

참혹한 비극 앞,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는가? 거대한 악에만 개입하라는 ‘규모의 오류’와 훼손된 자유에 대하여.   왜 침묵하시는가? 예전에 대화를 하다가 이런 질문을 받았다. “대체 왜 이런 일들에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시는 거지?” 개인의 신앙에 있어서 하나님의 침묵은 단련의 때로 해석되곤 한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철저히 홀로 버려진 듯했던 시간처럼 말이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참혹한 역사 앞에서 하나님은 침묵하시는가? (상) 계속 읽기

기독교인에게 중립은 없다 2: 정답을 독점한 종교는 어떻게 폭력이 되는가

[서론] 거룩한 결핍의 시작: 사랑이 허락한 틈 전통적 기독교 세계관에서 세계는 본질적으로 결핍과 회복의 순환관계를 가집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악(결핍)을 덮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가죽 옷이란 어떤 동물을 죽여야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완벽했던 세계에 ‘죽음’이라는 치명적 결핍을 야기했고, 아담과 하와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완벽함 속에 결핍, 곧 발타자르가 말했던 사랑의… 기독교인에게 중립은 없다 2: 정답을 독점한 종교는 어떻게 폭력이 되는가 계속 읽기

기독교인에게 중립은 없다 1

화려한 언변으로 치장해 중립을 마치 기독교 정신인 양 둔갑시켜도, 그건 그저 면피용 도덕적 알리바이이자 신학의 부재가 낳은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중립은 결국 양비론입니다. 이는 불의한 권력에 면죄부를 주고, 비겁하게 침묵했던 자들에게 면류관을 씌워주는 꼴입니다. 본회퍼는 나치에 부역하고 방조하면서도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뿐”이라며 도피했던 ‘중립적’ 교회를 향해, 그것은 “싸구려 은혜”라고 일갈했습니다.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투투… 기독교인에게 중립은 없다 1 계속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