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Bible 성경 다시 읽기

민주주의는 십자가가 아니다: 심판자가 된 교회

다수결은 하나님의 방식이었나?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유일한 민주주의의 ‘흔적’은 사도행전에서 일곱 집사를 선출할 때입니다.

사도행전 6:3 (NKRV)
3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이 말 이후에 초대교회 교인들이 기뻐하며 일곱 집사를 세우는 장면만 나오기 때문에, 사실은 정확하게는 어떤 방법으로 선출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짐작하기로는, 이 장면이 다수결의 방식으로 선출한 장면으로 여겨지곤 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장면들에서는 지도자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합의로 의해서 지명되거나 제비뽑거나 해서 선출되는데, 이 장면에서만 유독 그러한 설명 없이 오로지 사람들에 의해서 선출되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민주주의의 정당성이 성경에도 있었는가 하면, 그건 아닙니다. 선술했듯 이 외의 지도자 선출 방식이나 교회의 중대사를 결정할 때는 모두가 성령에 의한 감동으로 교회 구성원 전원이 옳거나 좋게 여긴 방향으로 선출되고 결정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안디옥 교회의 할례와 율법 준수 문제를 다루기 위한 예루살렘 공의회의 장면을 유심히 보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15:25–26 (NKRV)
25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
사도행전 15:28 (NKRV)
28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율법을 중시하는 야고보파와 이방인 선교를 중시하는 바울파 등 여러 세력으로 팽팽하게 갈라져 있었습니다. 이 치열한 갈등 속에서 만장일치라는 고도의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사상적 기틀에는 베드로의 발언이 큰 몫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5:9 (NKRV)
9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베드로는 안디옥 교회와 같은 이방인들에게 우리의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의 방식으로 할례를 받게 하고 율법을 지키게 해야 한다는 바리새파인들의 말에 흔들리는 장로들을 설득하며 위와 같은 말을 합니다. 이는 베드로가 일찍이 성령을 받은 후 요한과 더불어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사람을 고친 일, 이 일과 예수님을 따른다는 이유로 동포와 유대교에 박해를 받고 매질을 당한 경험, 스데반의 죽음, 사울의 회심으로 바울 됨, 백부장 고넬료의 회심 등과 같은 사건을 겪은 탓에 생긴 관점일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배신한 사람임에도 성령임재를 받았으며, 이적을 일으키고, 율법을 준수하고 선하게 살았음에도 자신과 가치가 다르면 죽이는 유대교와 유대교인들의 이면과 내면을 들여다봤으며, 그 일에 있어 가장 앞장서던 악마와 같은 사람이나 나라를 침략한 악인들도 하나님이시라면 구원하신다는 사실 앞에서 그는 차별적 관점을 모두 거두게 됩니다. 해당 사건에서 최종적인 타협안은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인 야고보에 의해 제시되었지만, 이 합의를 가능케 한 사상적 반석은 베드로가 세운 차별 없는 평등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개인적” 사상의 변화는 장차 기독교 믿음의 근간인 구원사적 사건의 복선이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베드로의 신학적 사상을 눈여겨봐야 합니다. 이 베드로의 시각은 당시 교회의 상황에서는 한 개인의 시각이 아니라 교회 전체의 시각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당시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교회의 가장 큰 어른으로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런 베드로가 세운 것은 자신의 관점과 개념에 사로잡혀 자신의 사상을 세우고 사람들을 거기에 강제로 편입시켜 자신의 믿음의 형태만을 따르게 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옳게 여기시는대로 나아가는데 그것은 곧 차별 없는 평등이었습니다. 이 위대한 개념은 장차 교회의 환대와 연대의 토대가 되며, 이로부터 교회의 정체성이 세워지게 됩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비롯한 유수의 저작들로 기독교의 사상적 기반을 세웠다면, 그 바탕이 되는 반석은 베드로가 세운 것입니다.


‘내 경험’을 공동체에 강요하지 않는 위대함


여기서 또한 주목해야 할 것은, 베드로가 자신 개인의 경험과 가치를 공동체의 경험과 가치로 욱여 넣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라인홀드 니버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개인의 도덕적 이상을 집단에 무비판적으로 투영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맹점을 지적합니다. 개인의 경험과 신념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려 들면 차가운 도덕주의자가 되어 자신의 틀 안에 들어오지 않는 이들을 배척하게 됩니다. 이런 개인의 도덕적 신념을 집단으로 주입하려는 이들이 지도자가 되면 독재가 시작되고,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면 광인이 됩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베드로의 모습은 굉장히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1. 그는 분명한 내외적 성령강림의 증거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것을 타인에게 강제하거나 자신의 입지를 세우기 위한 정치나 압제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았다.

2. 개인과 공동체의 영역을 분명히 분별했으며, 자신의 가치를 강요하지 않고 공동체의 “자유”를 존중했으며, 그 자유로 인한 타협과 결정에 순종했다.

3. “평등”이라는 것은 “내 관리, 시각 아래에서만 가능한 것” 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 아래에서만 가능한 일이므로, 나는 모두에게 나와 동등한 존재의의를 부여한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의 근간이며, 교회의 동맥입니다. 이것이 끊기는 순간, 우리는 죽습니다.


하나님의 신비는 무기가 아니다


제가 예수님을 믿은 계기는 성령 임재에 의한 환상과 신비한 체험들이었습니다. 저는 정말 수없이 많은 체험과 경험들을 하면서 영계를 갔다 오기도 하는 등 말도 안 된다고 여길 기적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목사가 되었어도 저는 지금까지 제 환상을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면서 영적 권위를 세워 제 방식대로의 신앙을 강요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영계를 다녀왔다는 이야기도 오늘 처음 꺼냅니다. 제가 제 경험들을 꺼내지 않는 것은, 첫째로는 아무리 신비로워도 저는 인간이기 때문에 이게 제 뇌의 혼란에 의한 착각인지 하나님의 신비인지 완벽하게 구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인식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기에, 고작 저라는 “인간”의 경험 따위로 하나님의 뜻을 함부로 확정 지어선 안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둘째로는 제 경험이 공동체의 절대적 목표나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나를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의 신비를 도구로 이용하고, 타인에게 나와 같은 방식을 따르라고 강요(내지는 암시)하는 순간 그것은 부자유의 폭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상이 된 이데올로기: 인간의 정치 체제는 정답이 아니다


베드로가 보여준 “평등”이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단지 동등하게 취급하는 것을 넘어, 나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타인이 설 자리, 여백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현대 한국교회의 다수가 혼란스러운 이유는 바로 이 기독교 고유의 평등과 자유의 정신을 정치 이데올로기 안에 가두어 버린 이들 때문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좇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치 체제만이 하나님의 완벽한 통치 원리라고 맹신하며 사람들을 그 안에 강제로 집어 넣어 자유와 평등을 억압하는 자신들의 행태를 진리로 둔갑시켜 교회의 동맥을 막고 잘라 교회를 죽어가게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1세기 당시 인간을 억압하던 율법이나 영적 세력들을 가리켜 세상을 지배하는 ‘초등학문’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이는 수준 낮은 학문이나 기초 학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근간이 되는 기반적 사상을 의미합니다. 베드로의 비판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믿고 따르는 가치가 달라야 하는데, 어째서 여전히 세상의 것, 다른 것을 중심에 두고 있냐는 질문이죠. 스탠리 하우어워스, 월터 윙크 등의 지적을 빌리자면, 오늘날 우리가 인간이 만든 정치 체제나 특정 이데올로기를 마치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인 양 우상화할 때, 그것은 곧 우리를 얽매는 억압적인 ‘초등학문’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기독교에서 발원한 고귀한 가치인 자유와 평등을, 세속적인 다수결이나 특정 진영의 정치적 구호로 축소시켜버리는 것은 이기적 맹신에 불과합니다.


심판자를 자처하는 자들에게


민주주의는 답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무리 정의롭고 사회정의에 기반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원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원리는 자신을 비워서 타인에게 공간을 내어주는 환대와 연대에서 시작됩니다. 민주주의라는 거창한 표어나 정치적 신념에 자신의 욕망을 감추고, 이를 따르지 않는 자들을 향해 악담과 저주를 마다하지 않는 태도는 그리스도의 길과 거리가 멉니다. 자신과 입장이 다르다는 이유로 형제를 향해 함부로 지옥을 운운하는 것은, 스스로 심판자의 자리에 오르려는 교만입니다. 주여 주여 하긴 하는데 지옥불에 던져질 자들, 염소들에 대한 이야기가 이러한 일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7:21 (NKRV)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25:33 (NKRV)
33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마태복음 25:41 (NKRV)
41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민주주의가 마치 교회의 십자가인냥 구는 행위들을 당장 멈추십시오.

당신의 정치적 신념은 당신의 이름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그 인간적인 이데올로기에 교회의 이름을 걸고, 예수님과 하나님의 이름을 거는 순간, 당신은 성경과 복음을 세속의 정치 논리로 오염시키는 것입니다. 나의 경험과 인식의 불완전함을 깨닫고, 타인의 생명과 자리를 존중할 줄 모른다면, 광화문에서 목에 핏대를 세우며 “주여 주여” 외친들 그 외침은 혐오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혐오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겠습니까?

당신들의 편견과 아집은 교회를 편협한 집단으로 전락시키고, 사역자들이 성경의 진리를 있는 그대로 전하지 못하게 옥죄고 있습니다. 나와 다른 이념을 가졌다고 배척하고 혐오하는 곳은 기독교적 자유와 평등이 없는 감옥입니다. 그런 곳을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까? 타인을 섣불리 심판하고 정죄하는 당신의 칼끝이, 성경이 경고하는 준엄한 심판의 칼로써 당신을 겨누고 있지는 않은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돌아보십시오. 인간의 이데올로기로 사람들을 현혹하며 교회의 동맥을 끊어내는 행위를 당장 멈추십시오.

강리바이블러의 아바타

글쓴이 강리바이블러

강경석 목사 | 예당교회 담임, Re:Bible 총괄 디렉터 감리교신학대학교 Ph.D 수료. 딱딱한 신학을 일상의 언어로 번역하며, 성서를 입체적으로 읽고 삶으로 살아내는 여정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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