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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Bible 성경 다시 읽기

방언 못 알아들으면 가짜? 담임목사님도 몰랐던 바울의 ‘팩폭’ 뼈때리기

교회 좀 다녀본 분들이라면 한 번쯤 경험해 보셨을 겁니다. 통성기도 시간만 되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정체불명의 쏼라쏼라.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뭔가 대단히 영적이어 보이고, 나만 못하면 왠지 믿음이 부족한 것 같은 그 묘한 압박감 말입니다.

“방언 안 되는 게 어딨어!” 담임목사님의 극대노 사건

부교역자 시절, 사역하던 교회는 방언 기도가 너무 과했습니다. 그러던 중 제가 고린도전서 12장 ‘은사’에 대해 설교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다른 거 다 빼고, 바울 형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했죠.

“자기 자랑이 아니라 공동체의 덕을 세우는 것이 방언의 목적입니다. 해석도 통역도 되지 않아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다면 덕이 되지 않으니, 차라리 통변의 은사를 구하십시오.”

사실 이 말의 속뜻은 이거였습니다. “자기만 알아듣고 남들은 못 알아먹는 언어쇼는, 성경이 말하는 진짜 방언의 목적과 거리가 멉니다.”

그렇게 예배 후,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평소 본인도 뜻 모를 방언을 뜨겁게 외치시던 담임목사님이 저를 조용히 부르시더군요. 그러더니 “방언이 왜 안 되냐, 난 그런 소리 들어본 적도 없다”며 발끈하셨습니다. 재미있는 건, 목사님이 부랴부랴 성경을 뒤져 고린도전서 14장 본문을 찾아오더니 “성경 전체에 이거 딱 하나 있는데, 이거 하나 가지고 그렇게 말하면 되냐!”고 따졌다는 겁니다.

팩트 체크: 바울의 뼈 때리는 ‘방언 사용 설명서’

자, 여기서 우리는 팩트 체크를 하나 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과연 바울이 ‘어쩌다 한 번’ 방언을 주의하라고 했을까요?

고린도전서 14장 27-28절을 한 번 보시죠.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바울은 영적인 척하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줍니다. “통역 안 돼? 그럼 교회에서는 입 닫고 집에 가서 혼자 해.”

진짜 방언의 목적: 외계어 vs 구수한 사투리 기도

초대교회 사도행전에 등장한 성령의 방언은 각 나라와 족속에게 복음이 증거되는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진짜 각국의 언어로 들렸고,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의 자리로 나아왔죠. 즉, 철저히 ‘타인’을 향해 있었고 ‘공동체의 덕’을 세웠습니다.

솔직히 말해, 누군지도 모를 외계어를 쏟아내는 것보다 구수한 한국어 각 지방 사투리로 서로의 아픔을 위해 눈물 흘려 기도하는 것이 성경적으론 훨씬 진짜 ‘방언’에 가깝습니다.

교회인가, 점집인가? 무속주의로 전락한 방언의 민낯

물론, 바울도 개인적인 영적 체험으로서의 방언(천사의 말)을 부정하진 않았습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신비한 언어가 있을 수 있죠. 하지만 핵심은 “그게 지금 교회에 무슨 덕이 되느냐”는 겁니다.

나 혼자 영적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위해, 혹은 내가 이만큼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이라는 걸 과시하기 위해 쏟아내는 뜻 모를 소리들. 방언이라는 신비한 현상만 좇다 보니, 교회가 샤머니즘적 무당 천지가 되어가는 걸 봅니다. 무당의 주문은 철저히 ‘나의 복’을 위한 것이지만, 기독교의 은사는 철저히 ‘남을 살리기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지금 당신이 내뱉고 있는 그 화려한 방언은 과연 꽉 막힌 누군가의 마음을 열고, 복음이 전파되는 길을 닦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저 무속적 신비주의에 취해 허공에 흩어지는 자기만족의 주문입니까?

강리바이블러의 아바타

글쓴이 강리바이블러

강경석 목사 | 예당교회 담임, Re:Bible 총괄 디렉터 감리교신학대학교 Ph.D 수료. 딱딱한 신학을 일상의 언어로 번역하며, 성서를 입체적으로 읽고 삶으로 살아내는 여정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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