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철학의 우상을 깨고 역사에 뛰어든 하나님. 하나님은 ‘보험’도, ‘부동의 동자’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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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상편 요약] |
기투(企投)하시는 하나님: 철학의 우상을 깬 십자가
고난은 타락한 인간의 탓이지만, 하나님은 이 절망적인 인과율 속에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않으셨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창세기 6:3)
하나님께서는 이 영원한 단절의 절대적 규범조차 스스로 깨뜨리시고, 인간의 역사 속에 자신을 기투하셨다. 일각에서는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불변’하시기에 스스로 세운 언약을 파기하거나 인간처럼 십자가에서 고통받으실 수 없다고 반박한다.
| [용어 설명: 기투(企投)]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와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로 대표되는 실존주의 철학의 핵심 개념으로 ‘스스로를 던진다(Throwness/Projet)’는 뜻. 아무런 보장 없는 부조리한 현실 속으로, 오직 대상을 향한 목적을 위해 자신의 전 존재를 던져 뛰어드는 것을 의미. 하나님께서 죄악 된 인간의 역사 속으로 육신을 입고 뛰어드신 십자가 사건이야말로 가장 위대하고 역설적인 ‘기투’이다. |
그러나 이러한 관념은 고대 헬라 철학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가 창안하고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가 기독교에 접목시킨 ‘부동의 동자(움직이지 않으면서 만물을 움직이는 제1원인)’라는 고리타분한 철학적 우상에 불과하다. 만약 하나님이 아무런 변화도 고통도 겪지 않는 부동의 동자라면, 그분은 삼위일체로 존재하며 역동적인 사랑을 나눌 수도 없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도 없다. 현대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은 그의 저서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고통받을 수 없는 신은 사랑할 수도 없는 신”이라며 이 헬라적 우상을 산산조각 냈다.
죽으실 수 없는 분이 죽으심으로 스스로의 규범을 깨버리셨다. 이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당신 스스로 세우신 언약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증명한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과 함께하다가 철저히 분리되었고, 그 뒤에 다시 십자가의 기투(은총)로 하나가 된 존재들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일상의 삶의 회복을 위해 얼마든지 부르짖을 수 있다. 이는 거래적 보험이 아니라, 나를 위해 자신을 던지신 하나님께 나 역시 기투하여 온전한 자유를 되찾는 신앙의 본질이다.
동역자를 향한 부름: 예정의 완성
그렇다면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예정)인가, 아니면 인간의 존재적 목적이 개입하는가? 바울은 이렇게 선포한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로마서 8:29-30)
하나님께서는 예정을 독단적으로 사용하지 않으신다. 인간은 에덴의 동산지기로 지음받았을 때부터 이미 하나님의 ‘동역자’로 확정되었다.
우리는 반펠라기우스주의처럼 인간에게 구원을 쟁취할 ‘지분이나 공로’가 있다는 식의 오류는 지양해야 한다. 그러나 구원의 과정이 하나님의 독력설(Monergism)로만 기계적으로 진행된다면, 굳이 하나님이 인간 역사에 기투하실 이유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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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 설명: 독력설, 반펠라기우스주의] |
인간이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다면 주님은 다른 피조물을 사용하실 수도 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9:40)
그러나 역설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대체 누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인가? 인간의 존재와 자유의지 없이는, 하나님의 예정과 십자가 사랑 역시 그 존재 목적을 상실하고 만다. 하나님은 반펠라기우스주의처럼 우리의 공로를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자체’에 하나님의 예정과 사랑의 목적을 두셨다.
하나님은 참혹한 역사 속에서 결코 침묵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부조리한 오늘 이 한가운데서, 우리를 수동적인 로봇이 아니라 훼손된 자유를 극복하고 사랑을 선택할 ‘참된 동역자’로 맹렬히 부르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