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고백하자면, 예정론 그 자체는 현대 신학의 사조 안에서 그리 대단히 중요한 논의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어찌 보면 신학의 가장 기초적인 입문 과정일 수도 있고, 혹은 인간의 이성으로 규정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으로 남겨두어야 할 사변적 주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예정론의 ‘위치’를 이토록 세세하게 따져 물어야 하는 이유는, 이 교리가 한국 교회 안에서 분열의 씨앗이 되고 극단적 근본주의와 세대주의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전락했기 때문입니다.
현재 한국 교회의 수많은 목회자와 성도들은 칼뱅의 이중예정론이라는 거대한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심지어 개혁적이라 자부하는 감리교회의 예비 목회자들조차 이 예정론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이중예정론이 단순히 개인의 신념에 머문다면 문제될 것이 없겠으나, 그것이 강단에서 선포되고 성도들의 정체성이 될 때 비극은 시작됩니다. ‘나는 선택받았고 너는 유기되었다’는 확신은 곧 독단적인 선민사상으로 변질됩니다. 니체가 간파했듯, 이러한 종교적 자부심은 타자를 하찮게 여기는 ‘노예 도덕’의 발현이자, 자신들만의 성벽을 쌓는 권력 의지에 다름 아닙니다. 여기에 한국 특유의 신비주의적 성향이 결합하면서, 타자를 정죄하고 배제하는 극단적 근본주의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왜곡된 예정론의 폐해는 교회 안에서만 머물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교회에서만 사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는 성도들에게 ‘선택받은 기쁨’과 ‘영적 충만함’만을 주입했을 뿐, 정작 그 예정이 담고 있는 삶의 무게와 지성적 성찰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 사회가 ‘세월호 사건’이라는 거대한 비극 앞에 섰을 때 한국 교회의 천박한 바닥이 여실히러났습니다.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은 고통당하는 자들과 함께 울며 역사 속에서 정의를 실현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예정론적 운명론에 중독된 한국 교회는 그 모든 고통을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이라는 이름 아래 합리화하며 이성적 사고의 결여를 드러냈습니다. 이는 니버가 경계했던 ‘도덕적이지 못한 사회 속의 종교적 이기주의’의 전형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맹목적인 무지의 종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신앙의 성숙은 단순히 “주여 주여”라고 외치는 고백에 있지 않습니다. 불트만이 강조했듯, 신앙은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매 순간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나를 던지는 ‘실존적 결단’의 연속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갈 것이 아니요”라고 선포하신 것은, 믿음이란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끝까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내야 하는 실천적 훈련임을 보여줍니다. 만약 하나님의 단 한 번의 선택으로 모든 구원이 자동 완성된다면, 우리는 악마 같은 행위를 일삼는 자들의 삶조차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해야 하는 모순에 빠집니다. 나는 죽어도 그럴 수 없습니다.
결국 예정론은 우리를 수동적인 꼭두각시로 만드는 사슬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인격적 협력자’로 세우는 초대장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삶을 주셨고, 그 삶을 일구라는 거룩한 명령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주인의 명령에 따라 신실하게 응답하는 종이자 동역자이지, 로봇이 아닙니다. 예정은 결코 우리의 책임을 면제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칼 바르트의 통찰처럼,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를 세상의 고통과 역사적 책임으로 밀어 넣는 강력한 동력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이여,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예정론에 정답은 없을지 모르나,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성경 앞에서 깊이 고민하고 자신의 삶으로 갈무리한 예정론이 있다면 그보다 뛰어난 신학은 없습니다. 부디 운명이라는 아편에 취해 삶의 현장을 방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예정 안에서 참된 자유를 만끽하며, 그리스도 예수의 형제로서 이 땅의 책임을 다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예정이고 진정한 구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