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아는 평신도 동생과 목회자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목회자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고 이 사회의 구성원이야. 똑같이 욕망과 유혹에 시달리지. 그들은 초인적인 영웅이 아니야.”
나의 이 말에 그 동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알지만, 성도 입장에서 그런 현실적인 이야기는 별로 듣고 싶지 않아요. 목회자라면 응당 감당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목회자를 평신도와 동일선상에서 보지 않는 이런 시각의 가장 큰 이유는, 일차적으로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오랜 고백인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셨다는 성육신의 신비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면, 그분을 따르는 목회자들도 똑같이 피곤을 느끼고 눈물을 흘리는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좀처럼 받아들이려 하지 않게 된다. 아니, 솔직히 말해 애써 모른 척하고 싶어 하는 것에 가깝다.
물론 성경은 분명 목회자에게 평신도보다 더 높은 수준의 헌신과 도덕적 모본을 요구한다. 야고보서 3장의 말씀처럼 ‘선생 된 자가 더 큰 심판’을 받는 자리임은 틀림없다. 건강한 성도들이 목회자에게 바라는 것 역시 극단적인 빈곤이나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세상의 상식조차 밑도는 탐욕과 타락을 경계하는 ‘높은 도덕적 책임감’일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높은 책임감’을 요구한다는 핑계로, 목회자들의 지극히 당연한 ‘인간됨’마저 부정하는 폭력적인 시선들이다. 목회자들에게도 일상을 유지할 ‘돈’이 필요하고,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으며, 지켜야 할 삶의 울타리가 있다. 그런데 목회자가 현실적인 생활고에 부딪히거나 유혹 앞에 흔들리면, 우리는 구조적인 문제나 우리의 무관심은 덮어둔 채 그저 그 사람의 ‘믿음이 부족해서’ 생기는 일로 치부해 버린다. 신앙이 부족하니 능력이 없고 용기가 부족해서 가난하다는 식이다. 이 얼마나 위험하고 잔인한 발상인가.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버리라”고 하신 것은 세상의 가치에 얽매이지 말라는 뜻이지, 정말 쓰레기통에 물건을 내다 버리듯 가족의 생계와 삶의 책임을 팽개치라는 의미가 아니다.
더구나 우리 개신교회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제사장’이라는 만인제사장설을 기초로 세워졌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강조한 핵심은, 목회자의 사역만 거룩한 것이 아니라 평신도의 일상 역시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제사장의 소명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왜 십자가의 무게를 유독 ‘목회자’에게만 강요하는가? 평신도가 돈을 벌고 먹고 살기 위해 행하는 모든 행위에는 합당한 목적이 있다고 믿으면서, 왜 목회자가 가족을 위해 최소한의 필요를 구하는 평범한 일상은 세속적이라며 잣대를 들이대는가?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태복음 16장 24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실 때 “목회자들만”이라는 단서를 달지 않으셨다. 십자가는 단순히 ‘가난’이나 ‘삶의 고달픔’이 아니다. 그것은 철저한 자아의 죽음과 순종이다. 목회자에게만 십자가의 고통과 희생을 강요하고, 정작 우리 자신은 어떤 희생도 없이 위로와 축복만 누리려는 태도는,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가 그토록 경고했던 ‘값싼 은혜’를 탐하는 이기심일 뿐이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조금 하자면, 나는 지금 돈을 크게 원하지 않는다. 그저 우리 가족이 소박하게 행복을 누리고, 내가 작은 교회를 운영할 수 있을 정도면 족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주어지지 않은 정도를 넘어, 모든 것을 잃은 상황이다. 그럼에도 나는 하나님의 뜻을 믿기에, 내가 아는 살아 계신 하나님은 늘 내 삶의 필요를 채워주셨기 때문에 이 각박한 상황조차도 내려놓을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채워 주실 것”이라는 이 고백을 진심으로 하기까지란 결코 쉽지 않았다. 어린 시절 어이없는 집안의 몰락으로 험한 꼴을 다 겪은 내게 돈은 원수이자 세상에 복수할 유일한 수단이었다. 내 신앙은 늘 거룩한 핑계로 돈을 추구했다. 그런 내 안의 끈질긴 교만과 아집을 꺾고 돈의 속박을 넘어설 수 있게 되기까지 무려 20여 년의 처절한 고뇌가 필요했다.
내가 개인적으로 이 슬픔의 터널을 통과했다고 해서 그것이 현실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는 다른 사역자들의 가난을 강요하거나 정당화한다거나, 혹은 가난으로 힘들어하는 이를 영적 부족함으로 탓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 순간 나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부정하는 모순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뼈를 깎는 고통을 거쳐 그 자리에 선 사역자들을 뵐 때면, 나 역시도 한 명의 성도로서 얄팍한 동정이 아닌 깊은 연민과 안타까움을 느낀다. 자기가 가고자 하는 십자가의 길 때문에, 사랑하는 자녀에게 남들 입는 좋은 옷 한번 못 입히고 맛있는 것 한번 마음껏 못 먹이는 그의 가슴에는 또 얼마나 많은 대못이 박혔을까. 하나님이 공급하심을 믿는다는 영적인 승리의 고백이, 당장 배고픈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인간적인 피눈물까지 마취시켜 주지는 않는다.
사역자는 초능력자가 아니다. 그리고 평신도는 사역자와 다른 무대에 서 있는 구경꾼이거나 십자가를 면제받은 특권층이 아니다. 사역자가 극도의 가난과 핍박 속에서 고통을 느껴야만 비로소 진정한 목사가 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그저 가학주의(사디즘)에 불과하다. 스스로가 ‘하고 싶은’ 혹은 ‘보고 싶은’ 이상적인 헌신의 페르소나를 타인인 사역자에게 투영하여 강요하는 것일 뿐이다.
자신이 이루고 싶은 헌신의 모습이 있다면 사역자에게 강요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먼저 그렇게 살아야 한다. 목사가 강단에서 선포한 대로 살지 않는다고 비난하면서, 정작 그 엄격한 삶을 강요하는 스스로는 세속의 가치를 좇아 사는 것은 대체 무슨 논리인가?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멀리 있지 않다. 당장 사역자에게 자신의 좁은 이념과 흠결 없는 도덕률을 들이대며 정죄하는 행위 자체가 스스로를 하나님으로 만드는 무서운 우상 숭배다.
그렇다고 성범죄를 저지르고, 온갖 불법과 위법을 달고 살고, 헌금을 착복하고, 쌍욕과 온갖 모욕적인 언사를 일삼는 상식 밖의 범죄자나 깡패인 목사 같지도 않은 것들에게 면죄부를 주자는 소리는 절대 아니다. 사역자도 인간이기에 겪는 일상의 연약함이나 생활고를 긍휼히 여기자는 것이지, 성범죄나 권력 사유화, 표절과 같은 명백한 범죄와 윤리적 타락까지 ‘인간의 연약함’이라는 이름으로 덮어주자는 의미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애초에 저런 것들은 사역자나 목회자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
다만, 우리가 진심으로 한국 교회의 회복을 바라고, 우리를 섬기는 사역자들이 바로 서서 역사에 남을 위대한 신앙의 섬김이가 되기를 원한다면, 냉혹한 각자의 잣대를 강요하지 말고 그들을 위해 긍휼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축복하자는 것이다. 그것이 불완전한 인간인 사역자를 위해, 똑같이 불완전한 인간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마땅한 일이다. 기도하는 귀한 입과 생각을 누군가를 정죄하는 더러운 도구로 내어주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평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