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Bible 성경 다시 읽기

참혹한 역사 앞에서 하나님은 침묵하시는가? (상)

참혹한 비극 앞,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는가? 거대한 악에만 개입하라는 ‘규모의 오류’와 훼손된 자유에 대하여.

 

왜 침묵하시는가?

예전에 대화를 하다가 이런 질문을 받았다.

“대체 왜 이런 일들에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시는 거지?”

개인의 신앙에 있어서 하나님의 침묵은 단련의 때로 해석되곤 한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철저히 홀로 버려진 듯했던 시간처럼 말이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마태복음 4:1-2)

그러나 개인을 넘어 역사 속에서 참혹한 비극에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절규한다. 하나님께서는 능히 막으실 수 있는 일이었는데 왜 방관하시는가? 이 무기력해 보이는 하나님을 난 못 믿겠다며 신앙을 버리는 사람도 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참혹한 역사 앞에서 침묵하시는 걸까?

 

자유의 본질: 고통의 규모와 조종당하는 선(善)


우리는 종종 거대한 학살이나 끔찍한 대형 참사 같은 ‘거대한 악’ 앞에서만 하나님의 침묵을 더 강하게 따져 묻곤 한다. 그러나 이는 철저한 ‘규모의 오류’이자 빈약한 순환논리일 뿐이다. 고통과 슬픔은 통계학의 문제가 아니라 실존의 문제다. 거대한 악은 슬프고 분노할 일인데, 한 개인의 고통은 별것 아닌가? 결코 그렇지 않다.

초기 기독교 신학의 기틀을 세운 아우렐리우스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us)은 악을 가리켜 독자적인 실체가 아니라 ‘선의 결핍(Privatio Boni)’이라고 정의했다. 하나님이 부여하신 선한 본성을 인간이 스스로 이탈했을 때 발생하는 공백이 곧 악이라는 것이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스스로 역사를 개척하며 이 땅의 인과(因果)에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2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창세기 3:22-23)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유를 악용한 한 사람 때문에 수백만 명을 향한 악의 제물이 될지라도, 자유의 본질적 허용은 동일하다.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과를 막기 위해 상황에 따라 선을 강제하고 개입하셨다면, 그것은 이미 ‘자유’가 아니다. 하나님의 인격적 대우란 인간에게 하나님의 말씀조차도 거역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주셨음을 의미한다.

 

오염된 자유와 빛의 소명

인간이 하나님과 분리된 것은 하나님이 버리셨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 쪽에서 이 자유의 상태로 맺은 ‘사랑의 계약 관계’를 파기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인간은 ‘하나님 없는 자유’에 던져졌고, 이 오염된 자유 속에서 빚어지는 끔찍한 굴레는 온전히 인간이 짊어져야 할 실존적 짐이 되었다.

우리가 참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 부조리를 극복하고 창조의 원형으로 환원하는 것, 그것이 곧 모든 피조물의 실존적 갈망이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로마서 8:19, 21)

그때까지 그리스도인이란, 이 참혹한 역사 속에서 부활의 능력으로 세상을 원래의 모습에 가깝도록 견인하는 빛과 소금의 소명을 감당하는 자들이다.

 

강리바이블러의 아바타

글쓴이 강리바이블러

강경석 목사 | 예당교회 담임, Re:Bible 총괄 디렉터 감리교신학대학교 Ph.D 수료. 딱딱한 신학을 일상의 언어로 번역하며, 성서를 입체적으로 읽고 삶으로 살아내는 여정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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