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거룩한 결핍의 시작: 사랑이 허락한 틈
전통적 기독교 세계관에서 세계는 본질적으로 결핍과 회복의 순환관계를 가집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악(결핍)을 덮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가죽 옷이란 어떤 동물을 죽여야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완벽했던 세계에 ‘죽음’이라는 치명적 결핍을 야기했고, 아담과 하와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완벽함 속에 결핍, 곧 발타자르가 말했던 사랑의 “틈”을 스스로 허락하십니다. (이전 제 글 ‘사랑은 틈을 허락하는 것’을 참고하세요.)
확신의 폭력: 보장된 ‘합(Synthesis)’이라는 함정
이 가죽 옷은 근원적 죄를 씻어주진 못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결핍-희생-회복’이라는 구조를 발견합니다. 이 구조의 결정적 절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입니다. 인간의 존재론적 결핍 상태를, 예수가 스스로 죽음으로 떠안아 희생의 사이클을 끊어내고 부활로 회복시키는 사건입니다.
대대로 신학은 이 결핍과 회복의 구조 속에서 발전해 왔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악을 ‘선의 결핍’으로 규정한 이래로, 헤겔의 변증법에 등장하는 정-반-합의 투쟁 역시 인간이 결핍(반)을 뚫고 궁극적 회복(합)으로 나아가려는 거대 서사로 자리 잡았습니다.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이나 판넨베르크의 ‘미래 시간의 선취’ 역시, 언젠가 다가올 완벽한 회복이 보장되어 있다는 목적론적 세계관입니다.
반면, 이러한 기독교적 목적론을 전면으로 반박하고 해체한 이들도 많았습니다.
들뢰즈는 인간의 욕망이 결핍이 아닌 ‘과잉’과 창조성에서 온다고 보았으며, 헤겔식의 궁극적인 “합(완전한 회복)”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일축했습니다. 니체나 데리다 역시 에덴 같은 원형적 회복은 허구이며, 인간은 헛된 종교적 희망에 기대기보다 철저하게 현실의 짐을 짊어지고 긍정하는(아모르 파티) 실존적 삶을 살아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 두 진영의 대립은 우리를 선택의 기로에 세웁니다. 미래의 희망(합)에 기댈 것인가, 아니면 종교적 환상을 버리고 철저한 실존으로 현재를 직면할 것인가.
얼핏 전자의 거대 서사가 더 ‘기독교적’인 정답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종말론적 승리와 회복을 확신하는 목적론적 세계관은 치명적인 위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완벽한 회복(합)과 정답이 이미 내게 주어져 있다고 믿는 순간, ‘지금 여기’에서 방황하고 결핍을 겪는 타인의 실존적 가치는 묵살되고 교정의 대상으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침묵과 실존의 기투: 응답 없는 세계에 던져진 인간
성경의 야곱과 요셉의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은 모든 결핍을 즉각적으로 해결해주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철저히 침묵하시며 오롯이 인간 혼자 삶의 무게를 감당하게 두기까지 하십니다. 이는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완전한 자유’ 때문입니다. 나의 삶은 나의 것이라는 완전한 자유의 보장이 인격적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홀로 짐을 지고 자신을 던지는(하이데거식의 ‘기투’) 치열한 실존적 투쟁이어야 합니다. 과정철학의 화이트헤드의 시각을 빌리자면, 하나님(신)은 강압적인 전능함으로 세계를 통제하는 심판자가 아니라, 피조물의 고통과 결핍에 함께 아파하며 ‘설득과 사랑’으로 과정에 참여하는 존재에 가깝습니다.
제국의 정의와 이란의 참극: 정답을 독점한 자들의 야만
이러한 실존적 긴장과 하나님의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인간이 스스로 완벽한 정답(합)을 쥐고 신의 자리를 차지하려 할 때 세계는 지옥이 됩니다.
가장 참혹한 예가 바로 최근 발생한 미국의 이란 공습 참사입니다. 하메네이를 암살하겠다는 그들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정의’를 관철하기 위해 한 초등학교를 폭격하여 수업 중이던 160명 이상의 어린아이들을 무참히 학살했습니다. 자신이 역사의 심판자이며 올바른 목적을 가졌다는 확신이, 생명이라는 가장 존엄한 현재를 짓밟고도 정당화하는 제국주의적 폭력으로 발현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적 사고(정답을 독점했다는 오만)가 타인과 기투를 잃어버리고 권력과 결탁했을 때 보여주는 야만성입니다.
종교적 가스라이팅과 ‘성령 훼방’: 율법주의라는 일상의 폭력
그리고 이 폭력성은 비단 전쟁터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도 형태만 다를 뿐 동일하게 자행됩니다.
세계는 각자의 결핍을 껴안고 아파하며 흘러가는데, 어째서인지 기독교인들은 결핍으로 방황하는 이들을 향해 너무나 쉽게 죄인이라 손가락질합니다. 술이나 담배, 혹은 다른 세속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결핍을 위로하려는 타인에게, 알량한 종교적 우월감을 들이밀며 그 사람의 생애 속에 있는 것들을 끊고 금지하라고 강요합니다.
이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타인의 근원적 자유를 훼손하는 율법주의적 폭력이며 가스라이팅입니다.
그 사람은 내가 아는 하나님을 아직 모르기에 자신만의 자연 치유 영역에서 결핍을 보상하려 애쓰는 것뿐입니다. 그 실존적 몸부림을 섣부른 종교적 잣대로 억압하고 통제하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주어진 천부적 자유를 억압함으로써 성령을 훼방하는 짓입니다. 보수 신학은 교리를 훼손하는 것을 성령 훠방이라고 하지만, 십자가의 보편성과 수용성을 기준으로 본다면 타인의 실존을 내 생각으로 굴종시키려는 그 폭력이야말로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성령 훼방’입니다.
[결론] 무력한 십자가의 역설: 중립 없는 포용
사람은 본질적으로 완벽할 수 없는 결함투성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아시기 때문에 우리를 심판대에 세워 공포에 떨게 하신 것이 아니라, 친히 십자가에서 모든 종교적 잣대를 지워버리고 스스로 무력한 결핍의 상태로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의 죄를 캐묻고, 자신을 드러내며, 스스로 심판자이자 성령의 자리에 오르려 합니까? 앞서 언급한 거장들의 두 진영은 단지 학문적 나열이 아닙니다. 전자는 하나님의 전능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타인(소자)의 가치를 축소시키거나 함몰시키고, 오히려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철저히 실존을 외쳤던 후자의 철학자들이 개인의 가치를 더 귀하게 여겼다는 역설을 우리는 직시하기 위해서입니다.
기독교인에게 중립이 없다는 이 논지는 토론할 거리도 안 됩니다. 그냥 그대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는 그 끔찍한 결핍의 순간에도, 차라리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절규하실지언정 자기를 찌른 자들을 원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 죄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그들을, 어떠한 종교적, 교리적 조건도 없이 끝까지 품어내셨습니다.
그것이 기독교 정신이고, 진정으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알량한 종교적 기준점과 교리가 아니라, 아이들을 학살하는 권력의 야만성을 배격하고 내 곁의 타인을 그 결핍 그대로 품어내는 무력한 십자가만이 유일한 진리입니다. 그 철저한 수용과 폭력적인 종교 시스템 사이에, 기독교인이 설 수 있는 중립 지대란 존재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