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 현대 예정론의 지평을 논함에 있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독보적인 이름은 바로 칼 바르트일 것입니다. 신정통주의라는 새로운 시대를 연 그는, 전통적 예정론이 가졌던 ‘누가 구원받고 유기되는가’라는 폐쇄적인 질문을 거부하고 예정론의 근본적인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는 예정이란 인간의 운명을 가르는 산술적 계산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단일한 인격과 사건에 관한 기록이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온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실 때 이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예정하셨으며, 그분 안에서 구원이 가능하게 될 인간과 그들이 발 딛고 서 있는 세상을 함께 예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칼 바르트의 ‘그리스도 중심적 예정론’
바르트는 전통적 예정론이 구원의 대상을 ‘개별 인간’으로 상정하여 발생한 결정론적 오류를 비판합니다. 바르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선택하시는 하나님’이신 동시에 ‘선택받은 인간’입니다. 즉, 하나님은 창세 전부터 예수 안에서 모든 인류를 사랑하기로 결정하셨으며, 인간의 거절보다 하나님의 ‘예’가 더 강력하다는 은총의 승리를 강조합니다.
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적 전회는 하나님의 주권과 전능한 권세를 조금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섭리를 가장 완벽하게 지켜내는 신학적 성취입니다. 바르트에게 있어 하나님은 스스로를 ‘인간을 위한 하나님’으로 예정하셨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곧 ‘선택하시는 하나님’이자 동시에 ‘선택받은 인간’이 됩니다. 여기에는 칼 라너가 강조했던 ‘초자연적 존재론’의 모습이 보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은총 안에 거하고 있으며, 인간 존재의 심연에는 이미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존재론적 구조가 마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칼 라너의 ‘초자연적 실존’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는 인간 본성 안에 이미 하나님의 은총이 주어져 있다는 ‘초자연적 실존’ 개념을 제시합니다. 이는 은총이 인간 외부에 있다가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구조 속에 하나님을 향한 개방성으로 이미 내재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의식하든 못하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존재론적 토대를 갖추고 태어난다는 ‘익명의 그리스도인’ 사상의 기초가 됩니다.
이 지점에서 전통적 칼뱅주의나 보수적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현대 신학을 향해 가장 거세게 반발하는 지점이 드러납니다. 바로 현대 신학이 인간에게 너무나 많은 가능성을 허락했다는 비판입니다. 바르트의 주장처럼 이 우주와 지구가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되었다면, 그것은 곧 지구상의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이미 구원자로 선택받았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인간으로 태어난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거대한 섭리와 예정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가 제안했듯, 우리는 이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희망할 수 있는” 신학적 용기를 얻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온 우주와 인류는 예수님을 향한 하나님의 압도적인 사랑 안에서 창조되었고, 그 사랑의 구원 예정 밖으로 밀려날 존재는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의 ‘보편 구원의 희망’
발타자르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것이라는 ‘보편구원설’을 교리로 확정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은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희망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은 지옥의 심연보다 깊기에, 지옥은 존재할지라도 “그곳이 비어 있기를 희망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정당하며 사랑의 정점이라고 보았습니다.
더 나아가 바르트는 인간의 이성과 하나님을 향한 반응에 대해 매우 진보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구원은 단순히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포로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실존적 응답이 마주칠 때 비로소 살아있는 사건이 됩니다. 이를 원문은 하나님과 인간의 ‘조화’와 ‘협력’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루돌프 불트만이 강조한 ‘실존적 결단’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예정은 박제된 교리가 아니라 매 순간 나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예(Ja)”라고 응답하는 결단의 연속입니다. 구원의 섭리가 신의 일방통행이 아니라 인간과의 인격적인 공명이라는 주장은,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인간의 전적 타락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불완전하게 만드는 위험한 발상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자유의지가 완전히 파멸되었기에 스스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루돌프 불트만의 ‘실존적 결단’
불트만은 성경의 메시지(케리그마)가 현대인에게 의미를 가지려면 ‘비신화화’를 통해 실존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에게 신앙이란 과거의 사건을 지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나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의 삶을 던지는 ‘결단’입니다. 예정론 역시 고정된 운명이 아니라 매 순간 일어나는 이 실존적 응답 속에서 현실화됩니다.
그러나 폴 틸리히의 관점에서 보자면, 하나님의 예정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새로운 존재’로 해방시키는 근거가 됩니다. 타락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 중심에는 여전히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남아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꼭두각시가 아닌 인격적인 파트너로 대우하십니다. 따라서 인간의 반응에 의해 구원의 사건이 시작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불완전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자유까지도 당신의 섭리 안으로 껴안으시는 하나님의 광대한 전능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폴 틸리히의 ‘새로운 존재’
틸리히는 현대인이 겪는 소외와 허무를 극복할 대안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새로운 존재’라고 불렀습니다. 예정론적 운명론이 인간을 무력하게 만든다면, 틸리히의 신학은 하나님의 은총이 인간의 유한성과 죄책감을 뚫고 들어와 인간을 본래의 온전한 모습인 ‘새로운 존재’로 변화시킨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는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아를 찾는 해방의 사건입니다
결국 현대의 예정론은 우리를 닫힌 과거의 숙명으로부터 해방시켜 위르겐 몰트만(J. Moltmann)이 말하는 ‘희망의 정치’와 ‘열린 미래’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예정은 이미 끝난 결정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 안에서 지금도 힘차게 박동하고 있는 하나님의 초대장입니다. 이러한 진보적이고 현대적인 관점이야말로, 한국 교회가 갇혀 있는 이중예정론의 차가운 감옥을 허물고 성도들이 그리스도인의 참된 자유를 만끽하며 삶의 현장에서 주체적인 책임을 다하게 만드는 신학적 동력이 될 것입니다.
위르겐 몰트만의 ‘희망의 정치’와 ‘열린 미래’
몰트만은 하나님의 예정을 과거에 완료된 ‘판결’이 아니라 미래로부터 다가오는 ‘약속’으로 재해석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역사를 종말로 이끄시는 분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열어주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예정론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고통에 저항하며 정의로운 미래를 앞당겨 사는 ‘희망의 정치’를 실천하게 만드는 동력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