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main content

Re:Bible 성경 다시 읽기

교회의 언어 바꾸기 -3편

십자가, 완전한 ‘무(無)’로의 도약과 자기 비움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던져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는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그런데 이 진리와 동시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하나 더 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철저히 완전한 “인간”의 몸으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둘, ‘완전한 인간’과 ‘죽음’이 우리의 신앙에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우선 ‘인간 예수’에 관해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인간의 몸으로 33년(학술적 차이에 따라서는 30년에서 36년까지로 보기도 합니다)을 사셨습니다. 그중 공생애를 3년이라 여기죠. 이 공생애의 시간 동안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무척 많았고,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기적을 통해 은혜를 입었습니다. 병 나음을 얻고, 배고픔을 면하는 등 우리가 성경을 통해 보는 기적들만 해도 대단하죠.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 잡혀가셨을 때 그 옆에 누가 있었습니까?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기 이전,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잡혀 죽어가실 땐 아무도 그를 믿는 자가 없었습니다. 바로 그 지점, 무력한 죽음의 십자가 곁에 아무도 없었던 그 황량한 지점이 어쩌면 지금 우리 신앙의 진짜 위치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실상은 나를 믿었던 것이지, 나는 그곳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도 없고, 그저 내 욕망과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을 결합시키고 싶어한 내 “언어의 집” 안에만 머물러 있었을 뿐입니다. 내가 지은 그 집이 있는 그 곳이, 바로 예수님 곁에 아무도 없었던 그 자리입니다.

 

우리가 “인간” 예수를 고백할 때는 흔히 우리와 같으신 분, 우리의 고통을 깊이 아시는 분, 우리 존재의 한계를 함께 겪으시는 분 등의 은혜로운 의미를 도출해내곤 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앞서 우리가 명확하게 직면해야 할 사실은 “나는 저 무기력하게 고난받는 인간 예수를 진짜로 믿고 있는가?” 하는 찔림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부활이 보장된 전능하신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스러운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실상은 고난받는 인간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기적을 베푸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 가깝습니다.

[한 인격 두 본성과 케노시스(자기비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인간으로서의 본성(예수)과 신으로서의 본성(그리스도)이 한 인격 안에 함께 존재한다는 고백입니다(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확정).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인간으로 사시는 동안 신으로서의 능력을 함부로 쓰지 않으시고 스스로를 철저히 제한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를 신학 용어로 ‘케노시스(Kenosis, 자기비움)’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수많은 기적과 이적 사건들은 당신의 전능한 신성을 마음대로 휘두르신 것이 아니라, 성령에 철저히 순종한 ‘인간’이 하나님의 능력을 삶 가운데 어떻게 담아낼 수 있는가를 보여주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조차도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아 성령님의 임재를 충만히 받으셔야만 했던 것이죠.

 

다시 처음부터 쓰는 신앙의 언어

자기비움(케노시스)을 이해하셨다면 이제 감이 조금 오실 겁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며 보여주신 것은 전능한 신이 아니라 철저한 “보편적 인간”의 모습이었습니다. 즉 ‘내가 신이기 때문에 이렇게 고난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기에 나를 완전히 비우고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자신을 철저히 비우심으로 나약한 인간 예수가 되셨고, 완전히 비워진 상태의 인간으로서 오히려 역설적인 하나님의 권능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니 십자가 앞에서의 예수님께는 자기를 방어할 어떠한 능력도 없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을 때까지도 가장 무능력하게, 완전히 비워진 “무(無)”의 상태로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이 무(無)의 상태, 예수님이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지 못하는 무능력한 상태가 되자 곁에 있던 사람들은 아무도 그를 믿지 않고 떠나버렸습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스스로를 “신학이 없는 신학자”라는 별명으로 부르곤 했는데, 왜냐하면 그의 깊은 철학적 사상이 사실은 신학과 성경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이데거의 ‘공포’와 ‘불안’, 그리고 ‘무(無)’]
하이데거는 ‘무(無)’라는 개념을 중요하게 다룹니다. 이는 단순히 눈앞에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없다’는 개념 자체도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비움을 의미합니다.
그는 인간의 감정을 ‘공포’와 ‘불안’으로 나눴습니다. 맹수나 재난처럼 구체적인 대상이 있을 때 느끼는 것이 ‘공포’라면, 대상이 없는 막연하고 근원적인 감정이 바로 ‘불안’입니다. 공포스러운 일이 닥치면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는데, 사실 그 두려움의 밑바닥에는 결국 ‘내가 죽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 같다’는 궁극적인 불안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즉,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결국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사라지는 상태, 즉 아무런 형태도 주체도 없는 “무(無)”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연을 파고 들어가서 우리가 느끼는 공포와 불안의 근원을 발견하면, 결국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나”와 “죽음” 둘뿐입니다.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죽으니까요. 그래서 인간에게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입니다. 인간이 느끼는 진짜 불안은 죽음의 과정 자체보다도, 죽음으로 인해 내가 완전히 사라져 영원한 ‘무(無)’의 상태로 떨어질 것에 대한 공포입니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놀랍게도 이 두려운 “무(無)”가 있어야만 우리가 우리의 존재성을 비로소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무(無)”는 모든 것이 소멸하는 끝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는 터전이 되기 때문에, 이 무가 바탕이 되어야만 우리는 진짜로 존재하게 됩니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우리 자신을 한 자루의 ‘연필’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씁니다. 자신의 몸통(흑연)이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세상에 내 흔적을 남기기 위해 쉼 없이 씁니다. 그리고 이내 흑연이 다 닳아 없어져 더 이상 아무것도 쓸 수 없게 되었을 때, 우리는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내가 사라진다고 거대한 공포를 느낍니다.

그런데 실상은 내가 닳아 없어지며 쓴 글들이 고스란히 남았고 그 흔적 자체가 바로 “나”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흔적을 남길 수 있도록 묵묵히 바탕이 되어준 텅 빈 ‘하얀 종이’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빈 이 하얀 종이가 바로 “무(無)”입니다. 내 생명만이 아니라 내 존재 자체가 비로소 서 있을 수 있게 해주는 근원적 터전, 그것이 바로 무(無)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모든 것이 끝나는 절망이 아니라, 바로 이 근원적인 터전인 “무(無)”를 향한 거룩한 도약이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신)이 어떻게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죽을 수 있는가?”는 오랜 세월 인간의 이성을 괴롭혀 온 질문이었습니다. 동시에 인류를 구원하게 한 위대한 질문이기도 했습니다. 인간이 자기의 이성으로만 보았을 땐 무력하게 죽어가는 예수를 보았기에 절망했지만, 신앙의 눈으로 보았을 땐 스스로 ‘무(無)’의 심연으로 뛰어드는 위대한 예수를 보았기에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이데거의 철학이 맞닿은 지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무’라는 것은 모든 것이 끝나는 멸망의 지점이 아니라 오히려 참된 생명이 태동하는 지점이었고, 원점으로의 회귀이며, 진짜 존재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기 전 아무도 그분을 믿지 않고 떠난 것에 대해 사람들의 불신앙을 핀잔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예수님이 진정으로 보여주고자 하셨던 것은 “보편적인 인간으로서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가장 두려운 “무(無)를 어떻게 대면해야 하는지”였습니다.

인간 예수가 철저히 무력한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던진 메시지는 “너희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노라. 너희의 얄팍한 욕망이 투영된 그 가짜 믿음을 깨우쳐라”라는 정죄가 아닙니다. 오히려 “너희가 지금 참된 믿음이 없는 이유는, 아직 너희 자아가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깊은 깨우침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수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의 진의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과거 죄를 대속해 주신 것으로만 만족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다는 것의 진짜 의미는, 우리가 철저히 비워진 ‘인간 예수’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내 입맛대로 믿으려 한다는 그 교만함을 처절하게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존재가 그저 내 병을 고치고 부자를 만들어줄 수 있는 ‘권능을 가진 그리스도’인지, 아니면 나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완전한 “무(無)”로 뛰어드신 ‘비워진 예수 그리스도’인지를 명확히 직면해야 합니다. 이를 알려고 하지 않는 것도 죄요, 불편하다고 피하는 것도 죄입니다.

이 불편한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의 민낯, “나”라는 우상의 실체를 낱낱이 알아야 합니다. 철저히 무력해진 예수, 나에게 아무런 기적도 베풀어주지 않는 십자가의 예수를 믿지 못하고 실망하는 나 자신을 먼저 정직하게 발견할 때, 우리는 비로소 나를 비우고 참된 은혜의 터전인 “무(無)”로 도약할 수 있습니다. 그제야 우리가 지금까지 방황하며 애써왔던 신앙생활의 시간들이 헛된 것이 아니게 됩니다. 단순히 회개 기도를 하고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헛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연약한 인간이고 여전히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나 자신을 직면할 수 있었던 기회가, 십자가의 역설을 비로소 납득하고 수용할 수 있는 신앙의 밑거름이 모두 그동안 내가 부딪히며 살아온 신앙생활의 여정 안에 묻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음 글에선…
예수님은 우리에게 철저한 비움과 십자가의 역설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신앙 공동체인 우리는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할까요? 마지막 4편에서는 칼 바르트가 말한 변증법적 신앙과, 정체성을 상실하고 차별과 배제에 빠진 한국 교회의 현실을 직시해 봅니다.

강리바이블러의 아바타

글쓴이 강리바이블러

강경석 목사 | 예당교회 담임, Re:Bible 총괄 디렉터 감리교신학대학교 Ph.D 수료. 딱딱한 신학을 일상의 언어로 번역하며, 성서를 입체적으로 읽고 삶으로 살아내는 여정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댓글 남기기

Re:Bible 성경 다시 읽기에서 더 알아보기

지금 구독하여 계속 읽고 전체 아카이브에 액세스하세요.

계속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