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Bible 성경 다시 읽기

교회의 언어 바꾸기 -4편

십자가의 언어를 잃어버린 타락한 교회, 그리고 회복

교회가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죄책감을 심어주는 것은 분명하게 잘못된 일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단순히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저지르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실수들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도덕적 실수를 넘어서는 근원적 ‘죄’]
성경이 말하는 죄는 ‘하나님과 분리되어 스스로 주인이 되려 하는 상태’라는 훨씬 더 근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도덕적인 죄악들에 무신경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가슴을 치며 진정으로 회개해야 할 본질적인 지점은 도덕적 실수를 넘어선 ‘교만한 자아’라는 것입니다.

도덕적, 윤리적 죄악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불완전한 육신을 입은 인간이 겪을 수밖에 없는 당연한 갈등의 과정입니다. 세상이 옳고 바르게만 살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니까요. 그래서 인간은 끝없이 갈등하고 번민하며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지루하게 반복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그 지긋지긋하고 반복된 죄악 속에서도 그들을 끝내 버리지 않으시고, 마침내 당신의 생명(예수 그리스도)까지 십자가에 내어주신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인간의 일상적인 죄를 십자가에 묻어 덮어버리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죄를 끝없이 발생시킬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 한계를 인간 스스로 깨닫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완전히 극복하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극복의 길이 바로 완전한 비움, “무(無)”입니다. 죽음의 공포까지도 이겨내며 십자가에서 인간 예수가 몸소 보여주신 길이 바로 이것입니다. 고통스러운 죽음의 불안도 예수님의 그 완전한 비움을 꺾지 못했습니다. 십자가에서 덮쳐 온 육신의 고통이 어찌나 컸던지,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절규를 토해내셨지만, 그럼에도 예수님은 고통의 공포가 밀어 넣는 죽음이라는 극한의 불안에 굴하지 않으셨습니다. 성자 하나님으로서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권능을 끝까지 사용하지 않으시고 자신을 완전히 비워 인간으로서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무(無)로 뛰어든 예수를 마침내 부활하게 하심으로써, 보편적인 인간이 자기를 완전히 비우고 죽음에 뛰어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이를 어떻게 위대하게 극복시키시는가를 세상에 명확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당장 지금 진짜로 목숨을 끊어 죽어야 한다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이미, 그러나 아직’ (Already, but not yet)]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부활은 죽음마저도 하나님께서 극복하게 하신다는 예표(미리 보여주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먼 훗날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도 부활할 것을 확신합니다. 구원은 ‘이미’ 나의 믿음과 삶에게 시작되었지만, 완전한 부활의 완성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이를 신학적으로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의 정체성은 바로 이 죽음을 닮은 철저한 비움, ‘무(無)’이자 ‘자기비움(케노시스)’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주신 믿음의 근본, 죄악을 끊어내는 단초, 원죄의 해결 방안 모두가 이 자기 비움 안에 담겨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예수님을 따르려는 자는 막연히 믿기만 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분명하게 “자기를 부인하고(비우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누가복음 9:23)고 하셨습니다.

나를 부인하고 자기를 비우지 않은 채,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있는 “나”라는 이기적인 존재 안에 크신 하나님을 억지로 가둬 놓고서는 내 삶에 어떠한 참된 은혜나 믿음의 섭리도 일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애가 아닌 자기비움에서 시작되는 믿음

칼 바르트가 말한 이 강렬한 충돌과 깨어짐의 사건이 바로 내 실체를 뼈저리게 아는 것과 ‘자기 비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를 산산이 부수고 비워내지 않고는 내 안에 아무런 하나님의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변증법적 사건으로서의 신앙]
칼 바르트는 신앙을 ‘변증법적 사건’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의 ‘변증법’은 타협점을 찾는 헤겔식(정-반-합)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철학자 키르케고르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무한한 질적 차이’가 있다고 강조하기 위해 차용한 것이죠. 신앙을 가지게 되면 철저히 닫혀있는 ‘인간의 본성’에 외부로부터 ‘하나님의 말씀(계시)’이 수직으로 내리 꽂히며 맹렬하게 충돌하는데, 이 때 타협(합)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교만한 자아가 산산조각 나는 ‘위기’를 맞게 됩니다. 바르트는 바로 이 철저한 부서짐과 깨어짐의 역설 속에서 비로소 참된 ‘믿음’이 발생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렇기에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상처받고 죄지은 세상 모든 사람의 마지막 피난처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가르치고 성경이 가르치는 인간의 궁극적인 도달점이 역설적이게도 가장 낮은 자리인 “죽음”, 곧 완전한 비움인 “무(無)”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한없이 높이는 곳이 아니라 완전히 죽어 장사 지내는 곳이 교회이기에, 교회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품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절대 절망까지도 십자가로 극복해 내는 곳이 교회인데, 이 세상에 교회가 품지 못하고 거부할 사람이 도대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 안에서 특정인을 향한 혐오와 차별이 발생하고 누군가를 거부하는 일이 버젓이 일어난다는 것은, 교회가 그 철저한 자기 비움이라는 정체성을 심각하게 상실했다는 증거입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스스로의 위치를 까맣게 망각했다는 뜻입니다.

교회, 곧 믿음의 공동체가 이렇게 정체와 방향을 상실했을 때,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무너지는 역사들이 계속해서 이어져 왔습니다. 성경은 이 역사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맞이한 쇠퇴의 위기 역시 누구를 탓할 것 없이 우리 스스로 자초한 일입니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알아보기에 게을렀고, 자정하기를 거부했으며, 자기의 언어로 감히 하나님을 규정하려고 한 그 오만한 죄악들이 쌓이고 쌓여 거대한 신성모독의 장소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이대로 돌이키지 않는다면 현대 한국 교회는 껍데기만 남은 기괴한 무엇인가로 되어가고 말 것입니다.

이러한 시기에 우리는 다시 우리의, 나의 언어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 언어들이 하나님을 규정하고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통감하고 지금이라도 원래의 언어, 성경의 언어를 회복해야 합니다. 차별과 배제, 다툼과 편 가르기의 언어는 교회의 언어가 아닙니다. “무”가 아니라 “나”들만이 잔뜩 살아 살벌하게 칼질하는 곳은 교회가 아닙니다.

 

부디 이 글을 함께 나눈 여러분 모두가, 내 안의 우상을 직면하고 철저한 자기 비움의 자리로 나아가 크고 무한하신 진정한 하나님 품에 온전히 안기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강리바이블러의 아바타

글쓴이 강리바이블러

강경석 목사 | 예당교회 담임, Re:Bible 총괄 디렉터 감리교신학대학교 Ph.D 수료. 딱딱한 신학을 일상의 언어로 번역하며, 성서를 입체적으로 읽고 삶으로 살아내는 여정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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