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하나님인가, 투영된 나 자신인가
인간은 창조될 때부터 하나님께로부터 자유를 받았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흙으로 창조하시고 그의 코에 하나님의 영의 숨결을 불어 넣어주셨고, 그로 인해서 인간은 “생령(살아있는 영)”이 됩니다. 곧 살아 있는(생; 生 – 육신적 기반) 존재임과 동시에 영혼을 가진(영; 靈 – 영혼과 정신적 기반) 존재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는 인간이 온전히 하나님처럼 완벽한 영적 존재는 아니고 피조물의 형태를 가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명령에 기계처럼 무조건 종속되는 수동적인 피조물만도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역설적이게도 태초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어길 수 있는 “자유”를 행사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것도, 가인이 동생의 생명을 죽인 것도 모두 이 끔찍하고도 무한한 “자유”가 주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자유는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 범주에 한계가 없습니다. 그 자유를 종속시키고 제한시킬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신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격적으로 존중하시기 때문에 억지로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에서, 특히 구약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끝없이 하나님과 죄악 사이를 오가며 지루한 반복의 역사를 보내온 것도 바로 이 “인격적으로 존중하시는 가운데 주신 자유”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억압받는 종으로 종속시키려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자유롭게 사랑하고 선택할 수 있는 인격적인 자녀로 대하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토록 제한될 수 없으신 하나님께서 무한한 자유를 주어 창조한 우리들이기에, 우리의 신앙과 존재성은 결코 인간의 좁은 언어 하나로 가둬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인가, 인간학인가?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포이어바흐는 신학을 두고 “인간학이라는 거대한 비밀을 품은 학문”이라고 날카롭게 평했습니다. 신학은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을 설명하는 학문인 듯 보이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결국 인간 자신에 대한 이해밖엔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완벽히 설명할 언어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기에, 결국 인간은 자신의 모습을 보며 인간의 한계 어린 언어로 적어 내려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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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사(투영) 이론과 칼 바르트의 반대] |
결국 우리가 지금까지 철석같이 “믿는다”라고 확신했던 그 대상의 실상은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라, 내 욕망이 뭉쳐진 “나”라는 우상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국 나라는 우상을 숭배한 것밖엔 되지 않고 그간 우리가 해왔던 신앙 행위들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 아닌가 하는 허무한 생각이 드실 겁니다. 그런데, 단언컨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고통스럽게 직면하며 도달한 이 “나”라는 종착점은, 굉장히 중요한 진짜 신앙의 시작점이 됩니다. 내가 믿어온 얄팍한 믿음의 정체와 나의 오만한 정체를 철저히 파악하고 부서지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야웨 종교)가 말하는 참된 은혜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글에선…
나의 정체가 결국 욕망이 투영된 우상이었음을 깨달은 그 절망의 끝에서, 우리는 십자가에 달린 ‘인간 예수’를 마주하게 됩니다. 3편에서는 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한 ‘무(無)’의 개념과, 십자가에서 모든 권능을 버리고 죽음을 맞이하신 예수님의 철저한 ‘자기비움(케노시스)’에 대해 살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