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Bible 성경 다시 읽기

달란트 유감 시리즈 ④ 교회를 삼킨 자본주의 괴물 – 교회에 차별이 발생하는 이유

교회가 언제부터 실적과 스펙으로 성도를 평가하는 주식회사가 되었을까요? 달란트와 은사의 오역이 한국 교회에 불러온 뼈아픈 자본주의적 계급 사회의 민낯을 고발합니다. 지난 3편에서 우리는 ‘은사’라는 단어가 개인의 영적 능력을 증명하는 스펙이 아니라, 공동체의 화평을 위한 도구이자 실존적인 고백(믿음) 그 자체임을 확인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아주 뼈아픈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의 본래 의도가 이토록 명확한데, 대체… 달란트 유감 시리즈 ④ 교회를 삼킨 자본주의 괴물 – 교회에 차별이 발생하는 이유 계속 읽기

교회의 언어 바꾸기 -1편

내 언어의 한계가 하나님의 한계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인간의 모든 것을 규정한다고 했습니다. 그렇기에 개인의 언어의 한계는 곧 그 사람이 인식하는 세계의 한계를 의미합니다. 즉, 내가 아는 만큼만 말할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만큼만 세계를 안다는 뜻입니다. 이 말에 반박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내가 모르는 세계가 있을 수 있는 거 아니냐?”라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모르는… 교회의 언어 바꾸기 -1편 계속 읽기

[관상기도 3편] 심리학을 넘어서는 침묵: 내 것을 비우고 타자를 채우다

이미지를 오른쪽으로 넘겨보세요 심리학을 넘어서는 침묵: 기복주의적 자아를 해체하는 렉시오 디비나 융 심리학의 무의식 탐구를 넘어선 진정한 관상기도의 의미를 살핍니다. 기복주의를 비판하고, 내 욕망을 비울 때 틸리히의 ‘궁극적 관심’으로 채워지는 백 배의 은혜를 소개합니다.   우리의 실존적 위기 앞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내 목소리를 멈추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관상’임을 2편에서 살펴보았습니다. 마지막 3편에서는 이 침묵의… [관상기도 3편] 심리학을 넘어서는 침묵: 내 것을 비우고 타자를 채우다 계속 읽기

나훔 3:1 “위선적 평화의 몰락”

“화 있을진저 피의 성이여 그 안에는 거짓이 가득하고 포악이 가득하며 탈취가 떠나지 아니하는도다” (나훔 3장 1절) 타인의 희생을 딛고 세워진 평화는, 가장 잔혹한 폭력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평온함과 성취는, 과연 무해합니까? 경쟁에서 이기고 얻어낸 견고한 내 자리. 우리는 종종 그것을 ‘합리적 경쟁’이나 ‘상생’이라는 세련된 단어로 위장하곤 합니다.   과거 ‘앗수르’라는 거대한 제국도… 나훔 3:1 “위선적 평화의 몰락” 계속 읽기

달란트 유감 시리즈 ③ 방언 못 하면 1달란트인가요? 가장 폭력적인 단어가 되어버린 ‘은사’

달란트의 사촌 격인 ‘은사’를 개인의 영적 스펙으로 오해하고 계시진 않나요? 방언을 비롯한 은사의 진짜 목적과 눈에 보이지 않는 가장 위대한 ‘믿음의 은사’를 실존적 신학으로 팩트 체크합니다. 지난 2편에서 우리는 달란트를 타고난 재능으로 해석하는 순간, 기독교가 사주팔자 같은 운명론으로 전락한다는 사실을 짚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달란트의 사촌 격인 은사(Gift)입니다. 교회에서 흔히… 달란트 유감 시리즈 ③ 방언 못 하면 1달란트인가요? 가장 폭력적인 단어가 되어버린 ‘은사’ 계속 읽기

참혹한 역사 앞에서 하나님은 침묵하시는가? (하)

십자가, 철학의 우상을 깨고 역사에 뛰어든 하나님. 하나님은 ‘보험’도, ‘부동의 동자’도 아니다. [지난 상편 요약] – 하나님의 침묵: 참혹한 역사 속 하나님의 침묵은 방관이 아니라, 인간에게 강제적 조종이 아닌 ‘완전한 자유’를 허락하신 필연적 결과. – 규모의 오류: 거대한 악(대형 참사)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억지로 개입하셔야 한다는 것은 순환논리이며, 고통은 규모가 아닌 실존의 문제. – 훼손된 자유:… 참혹한 역사 앞에서 하나님은 침묵하시는가? (하) 계속 읽기

[관상기도 2편] 흔들리는 실존 앞에서의 믿음: 부르짖기 전에 들어야 하는 이유

흔들리는 실존과 ‘듣는 기도’: 아브라함의 실패를 중심으로 믿음은 인간의 노력인가, 신의 은혜인가? 바르트의 ‘변증법적 사건’을 통해 능동적 믿음과 수동적 은혜의 충돌을 살피고, 아브라함의 실존적 삶을 통해 ‘듣는 기도’의 힘을 분석합니다.   지난 1편에서는 이기적 간구를 넘어선 신앙과 관상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믿음이 있어도 척박한 삶의 무게 앞에서 철저히 무너지고 흔들리는 것이 인간의… [관상기도 2편] 흔들리는 실존 앞에서의 믿음: 부르짖기 전에 들어야 하는 이유 계속 읽기

나훔 2:12 “포식자의 공허”

“수사자가 자기의 암사자들을 위하여 물어뜯고 자기의 새끼 사자들을 위하여 목졸라 죽여서 그 위혈로 자기 굴을 채우고 찢은 것으로 자기 구멍을 채웠었도다” (나훔 2:12) 누군가를 짓밟고 채워 넣은 나의 화려한 굴에는, 결국 나를 집어삼킬 지독한 공허만이 남습니다.   맹수가 자기 새끼를 먹이려 끊임없이 살생을 저지르듯, 앗수르는 타인을 물어뜯고 억압한 희생 위에 자신들의 삶을 세웠습니다. 세상은 오래전부터… 나훔 2:12 “포식자의 공허” 계속 읽기

달란트 유감 시리즈 ② 하나님이 ‘사주팔자’를 극혐하시는 이유 – 내 달란트는 이미 정해졌다?!

달란트를 타고난 재능이나 운명으로 해석하면 벌어지는 끔찍한 신학적 오류. 기독교를 사주팔자와 다를 바 없는 운명론으로 전락시키는 달란트 오역의 팩트를 체크합니다. 지난 1편에서 우리는 달란트를 스펙이나 능력치로 해석할 때 벌어지는 끔찍한 능력주의의 민낯을 확인했습니다. 자, 오늘은 그 논리를 한 걸음 더 삐딱하게 밀고 나가보겠습니다. 만약 내 달란트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다면, 우리의 신앙은 세상의 사주팔자나 운명론과… 달란트 유감 시리즈 ② 하나님이 ‘사주팔자’를 극혐하시는 이유 – 내 달란트는 이미 정해졌다?! 계속 읽기

참혹한 역사 앞에서 하나님은 침묵하시는가? (상)

참혹한 비극 앞,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는가? 거대한 악에만 개입하라는 ‘규모의 오류’와 훼손된 자유에 대하여.   왜 침묵하시는가? 예전에 대화를 하다가 이런 질문을 받았다. “대체 왜 이런 일들에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시는 거지?” 개인의 신앙에 있어서 하나님의 침묵은 단련의 때로 해석되곤 한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철저히 홀로 버려진 듯했던 시간처럼 말이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참혹한 역사 앞에서 하나님은 침묵하시는가? (상) 계속 읽기